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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 - 4부

관리자 0 11912
5월이 되면서 완연히 따뜻해진 봄날씨가 찾아왔다. 그리고 6일인 환우의 생일도 다가왔다. 소은과 생일을 보내리라 생각하고 있던 환우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지방에서 지내고 있는 고등학교 때 제일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2명이 생일을 축하해주러 올라오겠다는 것이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말하지 않아 그냥 날짜를 바꾸려고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인마! 너 보려고 나랑 철욱이랑 시간 빼놓은 건데 왜 날짜를 바꾸려고 그래. 우리가 특별히 올라가는 거니까 큰일 아니면 그날 보자.]

생각해보니 설날 이후에 처음 보는 친구들이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 올라온다는 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 수락을 하고 만다.

이제 문제는 여자친구인 소은이었다.
그러나 환우의 걱정과 달리 소은은 흔쾌히 이해해준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인데다가 너 생일 때문에 특별히 올라오는 건데 뭐 어때. 괜찮아.”

그렇게 말하던 소은은 웃으며 환우를 안는다.

“여자친구인 나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거니까. 안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너무나도 착한 소은을 꼭 안아주는 환우였다.

*

환우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철욱이와 재영이는 고등학교 때 가장 친하게 지내던 두 명이었다. 그런 친구들을 오랜만에 보니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술을 마시다보니 어느새 열두시가 넘었다. 환우는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본다. 하지만 여자친구인 소은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소은과 사귀고 나서 과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았었다. 그런데 소은에게선 문자 하나가 없었다. 아니 자신이 문자를 하면 답문을 보내긴 했다. 혹시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싶어 약간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해서 소은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때 소은은 환우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너 친구들이랑 노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환우는 자신을 배려하는 소은의 착한 마음씨에 무척 감동해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오늘도 그런 경우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피시방에서 첫차 뜰 때까지 기다리자는 식으로 형성되던 여론이 철욱이의 한마디로 뒤집어졌다.

“야 서울 올라왔는데 미아리 한 번 가봐야지.”

철욱이의 말에 재영이가 좋다고 난리를 쳐서 결국 미아리로 향하게 되었다. 환우는 돈이 없다고 하였지만 철욱이와 재영이는 둘이서 다 부담하겠다며 결국 환우까지 끌고 가게 되었다.

미아리에서 일을 치르고 친구들을 보낸 환우는 새벽의 찬 공기 속에서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반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익숙한 계단을 내려가는데 자신의 자취방 앞에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웅크리고 앉아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유소은…. 자신의 여자친구인 소은이었다.
옆에는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를 커다란 가방과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상자를 놓아둔 채 소은은 얌전히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었다.
놀란 환우는 황급히 소은을 흔들어 깨웠다.

“응, 응?”

“야 너 여기서 뭐해.”

잠에서 막 깬 소은은 밤새 추웠는지 양팔을 한 번 비비고는 환우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다.

“응…? 헤헤. 이제 왔네.”

“너 여기서 뭐하냐고.”

“나? 나 움…. 너 기다렸지. 너 생일 축하해주려고….”

환우는 크게 놀랐다.

“뭐? 그것 때문에 날 이렇게 기다렸어?”

그러나 소은은 무슨 소리냐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것 때문이라니! 우리 사귀고 처음 맞는 너 생일인데…. 헤헤…. 그래도 생일 날 챙겨주고 싶었는데 하루가 지나버렸네. 미안해…. 그래도 자 생일 선물! 생일 축하해! 내 남자친구!”

소은은 옆에 놓여 있던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상자를 집어 환우에게 건네준다. 조심스레 포장을 뜯어 상자를 열자 티셔츠가 곱게 접혀 들어있다.
환우는 말문이 막혔다. 화가 나서도 놀라서도 아니었다. 무언가 가슴에서 턱 막히는 느낌 때문에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티셔츠를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헤헤 마음에 들어?”

환우는 그렇게 묻는 소은을 바라보았다. 잠이 덜 깼는지 반쯤 풀려 있었지만, 행여나 선물이 남자친구의 마음에 들진 않을까 걱정이 가득 담긴 그녀의 눈빛….

“…당연히 마음에 들지.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어 바보야….”

목이 메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말을 잇는다.

“뭐하러 날 이렇게 기다렸어. 연락이라도 하지!”

“헤헤. 내 성격 알면서. 일단 나 좀 들여보내주세요-. 추워요-.”

소은은 그렇게 말하고는 환우를 꼭 껴안는다.

집에 들어가 커다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는 소은에게 환우가 물었다.

“너 그럼 밤새 기다린 거야?”

“응….”

소은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놀란 환우.

“그럼 집에 안 들어간 거야? 어떻게?”

“그냥 고등학교네 친구네 집에서 잔다고 친구한테 부탁해서 엄마랑 통화까지 다 시켜줬지. 히힛. 나 잘했지?”

환우는 또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의 생일을 챙겨주기 위해서 싫다고 하던 거짓말까지 하고…. 자신은 소은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친구랑 돈을 주고 여자와 관계를 가지고 왔는데…. 그녀에게 너무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는다.

“잘하긴! 으이구…. 근데 그 가방은 뭐야?”

환우가 가방을 가리키며 묻자 소은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황급히 말한다.

“아! 맞다. 잠깐 눈 감아봐. 꼭 눈 감아. 눈 뜨지 말고!”

환우는 소은의 난리에 엉겁결에 눈을 감는다.

“눈 뜨기 없기다!”

혹시나 눈을 뜰까 계속해서 그렇게 외치던 소은은 잠시 후 다 됐다는 듯 환우에게 눈떠보라고 말을 한다.

“아….”

눈을 뜬 환우의 앞에는 예쁘게 교복을 차려입은 소은이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검정색의 치마에 대비되는 순백색의 셔츠. 그리고 길지 않은 검정 넥타이….

“어때…? 어울려?”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환우에게 조심스레 묻는 소은….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을까….

“예뻐. 너무 예쁘다….”

“히힛. 다행이다…. 나 이 거 엄마 몰래 가지고 나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소은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환우가 그녀를 꼭 껴안았기 때문이다.

“앗…!”

소은은 자신을 갑자기 끌어안는 환우에게 살짝 놀란다. 그러나 이내 웃으며 환우의 품에 파고드는 소은….

그날 환우와 소은은 마치 서로 처음 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또 아름답게 사랑을 나누었다.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부드럽게….
서로의 하나하나를 놓치기 싫다는 듯 정성스럽게….

관계가 끝나고 누워있던 환우는 옆에 누워있는 소은을 바라보았다.
바알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
자신을 위해 뭐든 다 해주고 맞춰주는 착한 그녀….
너무 사랑스럽다….

“사랑해….”

환우는 소은을 꼭 껴안는다. 환우의 품에서 살짝 놀라는 소은….
놀란 듯 잠시 말이 없다….
허나 이내 천천히 그녀의 입이 열린다.

“…나한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준거네.”

“응…. 정말 사랑해.”

“헤헤….”

환우의 목을 꼭 끌어안는 소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나도 진짜진짜 사랑해….”

환우는 자신을 꼭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 여자아이가 진심으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어떻게 하면 이 아이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지만 이젠 그런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이젠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웃게 해줄 수 있을까,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지난 시간들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저 이 아이의 몸만을 탐닉하던 그때 그 자신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이 아이의 마음을 모르고 욕구만을 풀었던 그 날들이….
앞으로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껴주고 사랑해주리라….
그것만이 자신을 향한 소은의 마음에 대한 보답이니까.

*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환우는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다.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지 이제야 깨달은 자신이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응, 응. 알았어. 이따 연락해.”

학생회 일이 있다는 소은의 전화를 끊고 혼자 집으로 향하던 환우에게 모르던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지…? 여보세요?”

[저기…. 혹시 최환우 핸드폰 아닌가요?]

여자다. 그것도 자기 또래의….
처음 듣는 목소리 같은데 왠지 낯설지가 않다. 아니, 분명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다. 근데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예. 맞는데 누…구시죠?”

[아, 맞구나. 저기 혹시 나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나 그때 영문과랑 과팅에서 이은빈이라고…. 혹시 기억해?]

두근…!
환우의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한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응, 응…. 기,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한다고 호들갑을 떨 뻔한 걸 간신히 참는다.

[다행이다. 아직 학교니?]

“응….”

[그래? 그럼 저…기 이따 저녁에 잠깐 볼 수 있을…까?]

조금씩 뛰던 심장이 이젠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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