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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al! - 12부

관리자 0 3365
12부. 과연, 사랑…일까?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수림을 바라보며, 영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기, 저 앞에서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저 여자는…그럼 저 여자는…’



영후의 머리는 어서 빨리, 전화기에 대고 ‘하연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할 것을

재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입은 열리지 않았다.



“영후…씨…?”



망설이고 있는 영후의 얼굴을 웃음지으며 바라보던 수림은 그 순간, 여자만의 육감으로,

어서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자칫하면, 자칫하면 자신이 들어서는 안될,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바로 뒤돌아 뛰어들어 가 버렸다.

수림이 돌아가고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여전히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수림이 서 있던 빈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영후의 입은 천천히 그러나 겨우 열리고 있었다.











-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온 수림은, 주문하자 마자 점원이 가장 먼저 가져다 준

"오지 치즈 후라이"의 그 뜨거운 치즈로 범벅이 되어있는 감자 튀김들을 몇 번이고 집어 들어

채 삼키지도 못하면서도 연신 입안 가득 넣고 있었다.



“어…언니…”



“수림씨…”



남희 일행은 미처 말리지도 못한 채, 수림이 접시의 삼분의 일 정도를 비워낼 동안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무슨…일인 거지? 혹시 싸운 건가…?



모두들 비슷한 생각을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전화통화를 끝낸 영후가 자리로 돌아왔지만,

앉지도 못한 채 수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너무 많은 입안의 음식 때문에 끅끅 대는 모습에

테이블에 놓여있는 물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다 체해요…”



하지만 영후가 내미는 물잔을 무시하며 입안의 음식들을 애써 넘기려 하던 수림은 결국,

몇 번이고 켁켁 대더니 음식이 넘어오는 지, 입을 막고는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제가 가볼게요.”



따라 나가려는 혜미를 영후는 손으로 제지했다.



“내가…갈게. 먼저 먹고들 있어.”



영후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수림의 뒤를 쫓았다.





-

조심스레 여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영후는, 비어있는 첫 칸을 지나서야,

양변기 옆에 힘없이 쪼그려 앉아있는 수림을 발견했다.



“수림씨…”



영후의 부름에도 아무런 미동도 않는 수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영후는 그 칸으로 들어가

수림의 건너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변기를 사이에 두고 여자 화장실의 한 칸에서,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이 곳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었을 영후가 결국은 먼저 입을 열어야 했을 것이다.



“무슨… 생각 한 거에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영후의 입이 열렸고,

그제야 진정된 수림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저도 왜 그런 건지…”



차마 그 순간에 느껴졌던 알 수 없는 느낌에 대해서, 수림은 결코 말 할 수가 없었다.

괜히 입 밖으로 내보냈다가는 그것이 그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영후를 바라보았다.

차마 수림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그 남자의 옆모습은 이런 상황에서도 참으로 그윽해 보였다.



‘지금 이 남자는 이렇게 내 옆에 있는데…언제라도 이렇게 있어 줄 텐데…

그런데도 난 지금 무슨 걱정을 하는 거지…?’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수림의 머리 속에선 수림을 재촉했지만,

먼저 사과를 한 것은 이번에도 영후였다.



“그렇게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역시나 그렇게 따뜻한 영후의 말 한마디에 수림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바보…”



그제야 마주본 두 사람은 어색한 장소만큼이나 어색한 미소를 주고 받았다.

흐르는 눈물은 내버려둔 채 웃고 있던 수림은 억지 애교를 부리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 혼자 있게 하지 마요.”



어느덧 양변기위로 건너온 영후의 손은 수림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고,

그것만으로도 수림은 그 어떤 대답보다도 마음이 놓였다.



“아 맞다, 영후씨 배고프죠? 저 땜에…”



“괜찮겠어요?”



그래도 조금은 걱정스러운 영후의 눈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수림은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춰주었다.



“실은… 내가 더 배고파서 그래요.”



빙긋 웃는 수림의 손을 잡고 일어선 영후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며, 여 화장실의 문을 나섰고

마침 화장실을 가려고 들어서던 한 여자는 멈칫한 채, 잘못 들어 온 건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영후를 뒤따라 나오는 수림을 보고서야, 이해했다는 듯 질투 어린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본인이 왜 여기에 서 있는지를 아랫배로부터 다시금 전해 받고는,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여자 덕분이었을까, 수림과 영후는 긴장에서 해소되며 밝게 웃을 수 있었다.









-

“오전에 발표하신 선발 라인업에서 하근명 선수를 비롯해 A매치 경험이 풍부한 선수들을 모두 제외하셨는데요. 이번 선발진은 너무 무게감이 떨어진다고 보진 않으십니까?”



한 기자의 질문이 쏟아지자 마자, 무덤덤하게 인터뷰 단상에 앉아있는 노감독에게로 플래쉬 세례가 쏟아졌다.

질문이 불편했을까, 카메라 불빛이 불편했을까. 꽤나 인상을 쓰면서 노감독의 입이 열렸다.



“선발된 선수들은 K리그에서 충분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리그를 지켜보신 축구기자시라면

충분히 납득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연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축구 전문기자가 아닌 야구 전문 기자가 한 ‘우문’에

노감독은 아무렇지도 않게 ‘현답’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혹시 선수들이 대표팀에 소집된 후에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건 아닙니까?



역시나 노감독의 탓으로 몰아가려는 사냥이 시작되기 시작하자, 하연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본인과 소속팀에서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어리광을 부릴 거라면, 처음부터 대표팀에 들어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덤덤하지만 단호한 노감독의 답변에 하연은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예전과는 달리 A매치를 앞두고 선수 소집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48시간에서 72시간이 고작이었으니

노감독의 말은 결코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제 국가대표팀 감독이란 자리는 새로운 선수를 발굴해

훈련시킬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저, 각 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면밀히 검토해서,

그에 맞는 전술을 완성해야 했고 그렇게 그들과 이삼 일을 보낸 후 경기를 치러 내야 했다.



때문에, 손 발이 맞지 않을 것을 우려한 전 국가대표감독들은 어지간하면 세대교체를 하지 못했고,

네임 밸류만 넘치는 선수들을 선발로 내세워, 혹여 경기에 패하더라도 그 선수들을 방패로 내세워

언론의 집중포화에서 도망가곤 했었다. 하지만 노감독은 이미 불러들인 선수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오로지 실력만을 평가해서 뽑았기에, 어찌 보면 기자들의 먹이감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인터넷에 나돌고 있는 대표팀 연습경기 결과가 이번 선발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이 질문이 왜 안 나오나 했던 하연은,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연습은… 그저 연습일 뿐입니다.”



간단한 대답 후 앞에 놓은 물컵을 집어 들고 한 모금 마시는 노감독에게 또다시 엄청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그 영상을 보고 난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이영후 선수가 완전히 부활했다는 평이 많습니다.

노감독님께서는 이영후 선수의 은사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이영후 선수가 언제쯤 축구계로 돌아올지 알고 계신 건가요?”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노감독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 기자의 질문이 더해졌다.



“돌아오는 건 확실한 건가요?”



이번 인터뷰 중에서 어쩌면 가장 고심하는 듯 한 노감독의 모습이었다.



“그건…그 놈만이 알고 있지 않겠소?”



노감독조차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기에, 언제나 스트라이커 부재에 골머리를 앓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불운한 이영후’를 추억하며 잠시 침묵을 하고 말았다.

허나 갑자기 고요해지는 공간을 깨뜨리는 낭랑한 하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근명 선수의 컨디션은 어느 정도 인가요? 정말 후보에서도 제외될 정도로 최악인 건가요?”



어지러운 회견장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하연이었기에, 질문과는 상관없이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로

쏠렸고, 노감독도 하연을 발견하고는 조금 미소를 지었던 것도 같았다.



“그 놈은…컨디션보다는…자신감 회복이 먼저일 것 같소만.”



노감독의 답변을 듣고 난 하연은 자신이 들고 있는 레코더에 녹음되지 않을 만큼 약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어 보았다.









-

영후는, 왜 여자들이 다이어트에 목을 매는 건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각종 요리로 가득했었던(!) 접시들이 모두 설거지를 마친 그릇처럼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아직 그녀들의 저녁식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는 것이었다.



“에이, 먹다가 자꾸 흐름 끊기면 많이 못 먹는데.”



포크를 쪽쪽 빨아대며, 윤지가 입을 열었고,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빨아대던 수림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이러다 괜히 헛배만 부르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시선을 돌려본 영후의 눈에 잡힌 아무 말도 없는 혜미는, 계속 리필 되고 있는 빵에 연신 잼을 발라

우물거리고 있었고, 설마 하는 눈으로 바라본 남희마저도 남아있는 소스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으며

다음에 나올 음식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도대체…저 음식들이 다 어디로 들어갔다는 거야?’



전혀 배가 나온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 여자들의 모습은 기적만 같았기에,

한 끼 식사비용으로는 오늘 지출할 비용이 최대가 될 것임을 확신하며 영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저씨, 아 참, 감독님. 오늘 입부한 인원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아세요?”



윤지의 갑작스런 질문에, 영후는 그제야 오늘부터 자신들의 축구팀 창단 작업이 시작되었었음을 깨달았다.



“글쎄…한 스무 명 넘었니?”



입에 넣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남희가 입을 열었다.



“0을 하나 빼먹으셨어요.”



“예에? 그게 정말이에요?”



담담하게 입을 연 남희와는 달리 영후는 새삼 놀라고 있었다. 하루 만에 그 인원이 모였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이내 그것보다 더 대단했던 건 윤지의 발상이었다고 영후는 생각했다.



‘좀 갑작스런 짓만 안 하면 좋은데 말야…’



잠시 윤지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는 영후를 부른 건 수림이었다.



“영후씨! 또 어디 가 있는 거에요!”



수림의 말에 흠칫 놀라며, 영후는 순간 나이프 하나를 떨어뜨렸다.



“아, 미안해요. 남희씨 말에 너무 놀라서 그만…”



영후는 떨어진 나이프를 집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였고, 무심코 테이블 속 광경을

정면으로 바라본 영후는 순간 놀라 고개를 들다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쾅!



‘윽!’



하지만 아프다고 찡그릴 사이도 없이 영후는 재빨리 고개를 테이블 위로 들어올릴 수 밖에 없었다.



“영후씨, 괜찮아요? 그냥 두지 그랬어요.”



“아 예, 괜찮아요.”



멋 적은 듯, 머리를 긁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영후였지만, 괜히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었기에

혹시나 누군가 심장소리를 들을까 조마조마 한 눈치였다. 그 이윤, 역시나 윤지 때문이었다.

영후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윤지는 영후가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은밀한 속살이 그대로 보일 수 있도록, 자신의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노 팬티였던 윤지의 다리 사이를 보게 된 영후는 그제야,

화장실에서 왜 그렇게 쉽게 섹스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경계 대상 1호야, 쟤는…’



테이블 위로 몸을 일으킨 영후와 살짝 눈이 마주친 윤지는 역시나 아무도 못 알아챌 만큼 빠르게

‘찡긋’하며 윙크를 보내주었고, 영후는 짐짓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감독님, 인원이 많이 모인 건 좋지만, 그 인원을 모두 통솔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겠죠?”



남희의 걱정스런 발언에 영후도 그제야 같이 걱정을 해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영후 혼자서 그들을 가르치기에는 조금 벅찬 감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 하루만으로 입부 지원을

마감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인원은 더 늘어갈 가능성이 다분했으니 뭔가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 했다.



“제가…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수림에게로 향했다.



“수림씨…”



“전, 지금이야 수영장에서 강사를 하고는 있지만, 원래 체육교육과를 나오기도 했고,

또 예전에 운동하다 다쳤을 때 재활했던 경험도 있었어서, 기초체력에 관련된 것들은 어느 정도

지도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수림의 갑작스런 제안에 모두들 당황하는 가운데, 특히 남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건 역시나 이번에도 윤지였다.



“그럼 저도 도울래요!”



“야, 네가 뭘 한다구?”



아무리 축구 보는 걸 좋아한다지만, 축구에 관한 직접적인 것은 젬병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혜미는 바로 윤지를 만류했다.



“이래봬도 난 캠코더 촬영에 자신 있단 말야.

분명, 이런 것도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정보가 중요한 시대니까.”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희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코칭 스텝 환영회인건가요? 어쨌든 모두들 환영합니다.”



순간 모든 이들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음료수 잔을 들어올렸고,

그야말로 엉겁결에 한국여대 축구단 코치가 그 곳에서 인선되고 있었다.









-

“휘~익!”



취재를 마치고 주차장에서 자신의 차를 찾고 있던 하연은 생경한 휘파람 소리에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휘파람의 근원지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청바지 차림의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누구…?”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하연을 위해, 그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 챙을 손가락 하나를 이용해 조금쯤

들어올려 주었고, 그제야 하연은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계산을 마치고 나온 영후에게 남희 일행은 포만감에 만족한 듯,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 감독님.”, “저두요, 감독님!”, “이번 한 번으로 끝내는 건 아니시죠?”



하나같이 다들 예쁘고, 착한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은 영후 또한 기분 좋게 답례인사를 했다.



“오늘 다들 애써줘서 고맙고, 내일부터는 더 바빠질 테니 각오들 하라구.”



영후의 인사를 끝으로 남희와 혜미는 발걸음을 돌렸고, 윤지는 그들보다 한 박자 늦춘 채

영후와 수림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혜미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귀여운 아이들이에요.”



너무나 귀여워 꽉 깨물어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수림이 말했고, 영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그런가요?”



수림의 말에 떨떠름하게 답변을 하던 영후였지만, 여전히 시선은 윤지에서 떨어질 줄 몰랐기에

그런 영후 덕분에 수림은 또다시 기분이 살짝 상할 뻔했다.



“흥, 나도 저맘때는 꽤 귀여웠다구요.”



나름 날카롭게 세운 팔꿈치로 영후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가격하며 수림이 삐친 듯 한마디 했고

불의의 일격을 당한 영후는 숨을 겨우 쉬며, 변명을 해보았다.



“아이구야, 지금도 수림씬 충분히 귀여운걸요. 켁켁…”



영후의 말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 수림은 다시 헤헤거리며 영후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우리 좀 아쉬운데, 어디서 한 잔 더 할래요? 내가 진~짜 분위기 좋은데 알고 있는데.”



수림덕분에 술꾼이 될까 걱정이 되던 영후는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나 너무나 귀여운 수림의 눈망울이 처연함을 가장한 채 영후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나마 기자 월급 생각해줘서 고마운데요?”



작지만 아담한 재즈바에 앉은 하연이 마티니 잔에 담겨져 있는 가니쉬 ( 칵테일에 레몬이나 체리,

올리브를 꽂아놓은 막대 : 작가 주)를 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크아~! 뭐, 같이 취하자고 마시는 건데 좋은 게 좋은 거죠.”



맥켈란 한잔을 스트레이트로 넘기며, 근명이 ‘쓴’ 답을 하고는, 연이어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그나저나 오늘 영감님 진땀 꽤나 뺐죠?”



“뭐, 기자들이란 다 그런 식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셈이니까요.”



음미하듯 마티니를 마시는 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근명은, 자신의 잔에 다시금 술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박기자님 같은 분만 계시면 참 좋은 데 말이죠.”



“훗, 알고 보면 저도 다른 기자 못지 않아요.”



역삼각형 모양의 잔에 담겨있는, 마티니 속 올리브의 묘한 일그러짐을 바라보며 하연은 한숨 쉬듯 말을 했다.



“아니요, 분명 다릅니다.”



마치 확신을 하듯 말하는 근명을 그제야 조금은 똥그란 눈을 해서 바라보는 하연이었다.



“뭐가 그렇게 달라 보이던가요, 제가…?”



“그건…그건 저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다를 거라고, 또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근명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하연은 잠자코 마티니를 한 모금 더 넘겨보았다.



“다르니까…그러니까…박기자님을 선배가 좋아하는”



“하연아…!”



순간, 이런 장소, 이런 시간대엔 절대 들려선 안될 낯익은 목소리가 근명의 말을 가로막으며

하연의 귀에 흘러 들어왔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하연은 너무나 기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가 있을 법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나, 하연의 기대와는 달리 그 곳에는 영후뿐 만 아니라

처음 보는 단발머리의 귀여운 아가씨가 행여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아이처럼 영후의 어깨에 꼭 붙어있었다.



누군가는 무슨 말을 해야만 했지만, 하연은 수림을, 영후는 근명을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고만 있었다.

영후는 순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받았던 전화속 근명의 질문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고

그제야 이 상황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물론, 이해가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선배…”



이상한 기류 때문에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근명을 붙든 건 다름아닌 하연이었다.



“어쩌지? 우린 다른 데 가서 한 잔 더 하려고 했는데, 아쉽네.

아 다행인가?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게 돼서? 어쨌든 나중에 보자. 가요 근명씨.”



아무런 감정도 없는, 마치 기계음처럼 읊조리던 하연은 근명의 팔짱을 끼고는 카운터로 걸어갔고,

마지못해 끌려가던 근명은 우물거리며 인사를 남겼다.



“선배, 그럼 나중에…”



그렇게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영후는 차마 돌아보지 못했고,

그런 영후의 팔을 붙들고 있던 수림의 손에는 조금씩 힘이 풀려가고 있었다.



‘그랬구나. 이 사람 마음에 들어와 있던 건…’



조금씩 떨리고 있는 한 남자의 어깨에, 손도 대보지 못할 정도의 거리감을 느껴본 것은

수림으로선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었지만, 처음치고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



“우와, 데따 넓다. 근데, 진짜 여기서 너 혼자 살아?”



윤지의 아파트에 처음 와 본 혜미는, 연신 이 방 저 방을 들락거리며, 집 구경에 여념이 없었고,

윤지는 그런 혜미를 내버려둔 채 욕실에 들어가 욕조의 온수를 틀었고,

시원한 소리와 함께 밀려나온 물들은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며 거울을 뿌옇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미국에 들어가셨거든!”



물소리에 묻힐까 꽤나 큰소리로 대답하는 윤지였다.

그제야, 욕실 문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혜미가 물어왔다.



“안 무서워? 혼자서?”



소매를 걷은 한 팔로 욕조의 물 온도를 가늠해보며 휘휘 저으며 윤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전혀.”



“보기보다 강심장이구나 너?”



티셔츠 하나를 천천히 벗으며 혜미는 던지듯 툭 말을 했지만,

그 질문에 윤지는 조금쯤 쓸쓸한 얼굴이 되었던 것도 같았다.



‘글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언제부턴가,

윤지는 홀로 있는 것만큼 편한 순간이 없었던 것도 같았다.



“먼저 할래?”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윤지가 정신을 차린 건, 혜미의 물음 덕분이었다.



“아니…아…”



어느새 몸에 걸치고 있던 옷가지들을 전부 벗어 버린 혜미의 나신에, 윤지는 잠깐 넋을 놓고 말았다.

여자의 몸이라고 하기엔 너무 탄력이 넘쳐 보였고, 남자의 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드러움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리 뛰어난 ‘명마’의 몸이라 해도 혜미 앞에선 고개를 숙여야 할 거라고 윤지는 생각해 보았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니? 여자 처음 봐?”



하루에 몇 번이고 남자 몸을 바라봤어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던 윤지였건만,

같은 여자인 혜미의 알몸을 보고 있노라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미안…근데 너 몸이 참 예쁘다…”



“흥, 이래봬도 내가 쫌 한 몸매 하시지!”



창피한 것도 모르고, 혜미는 윤지가 보란 듯이 한껏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런 혜미의 아름다운 몸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윤지도 이내 티셔츠를 벗으며 한마디 했다.



“같이 하자, 목욕”







-



맞은 편에 앉아 홀로 잔을 채워가며 연거푸 들이키고 있는 수림을 만류할 생각도 못한 채,

영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런 건 도대체…’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에 영후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에게 냉랭했던 하연도 처음이었거니와, 그런 하연에게

아무런 말도 해보지 못한 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도 처음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고민에 괴로워하는 영후를 환기시켜준 건 다름아닌 수림이었다.



“뭐에요…이게…”



혀가 꼬일 대로 꼬인 채 영후에게 인지 스스로에게 인지 말을 하고 있는 수림 덕분에,

이미 반 이상이나 비워져 있는 잭다니엘을 바라보고는 수림의 손에서 빼앗아 들고는 조용히 말을 하는 영후였다.



“그만 마셔요. 그만 마시고 이제…”



“내놔요!”



술을 마셔서 인지, 힘도 조금은 세진 수림은 기어코 영후의 손에서 다시금 술병을 빼앗아 갔고,

또다시 넘칠 만큼 술잔에 술을 부었으며, 힘겹게 또다시 들이켰다. ‘탁!’소리를 내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수림은 주정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영후씨도…사람이 그럼 못써요…못 쓴다구요…어떻게…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예?”



수림의 한 맺힌 듯한 절규에 영후는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도대체 나란 놈은 어떻게…’











-

하연 또한 근명과 함께 호텔의 바로 자리를 옮겨 어두침침한 조명과 분위기에는 걸맞지 않게

연신 잔을 비워대고 있었다.



“좀 천천히 마셔도 되는 게 술 입니다만…?”



은근슬쩍 ‘발렌타인’을 빼앗아 드는 근명의 손을 잡아채며, 하연은 또다시 비워진 자신의 술잔에

넘치도록 술을 부었다. 그리고 타는 듯한 통증을 무시하며 또다시 식도로 흘려 보냈다.

이 정도의 고통은 왠지 고통 같지도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리, 밤을 새우며 아무리 술을 마셔보아도,

지금 느껴지는 가슴의 고통은 절대 치유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연은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들이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 따윈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 아파해야 하는 거지…? 난…난 그 녀석과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그저…그저 친구였을 뿐이었잖아…친구…그런 거 아니였어?

박하연, 혹시 너…혼자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거야?’



옆에 앉아 있는 근명은, 또 다른 자아와 다투고 있는 하연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박기자님은 어떤 겁니까?”



조금쯤 풀린 눈으로 그제야 하연은 근명을 바라보았다.



“뭐…가요…?”



멍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던 근명은 이내 답답하다는 듯이 술잔에 술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겨우 숨을 쉴 수 있어진 듯, 숨을 몰아 쉬어보곤 다시 하연을 바라보았다.



“선배를…그러니까 영후 선배를…”



마치 금기시 된 단어를 들어버린 양,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근명을 바라보던 하연의 눈에선

‘똑’하고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더니만, 이내 거침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마침내 하연은 고개를 파묻고 엉엉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 나…이 아가씨… 우는 것도 이쁘네…’



이런 격조 있는 장소에서, 은은한 음악소리를 죽일 정도로 울어대고 있는 하연 덕분에

모든 손님들의 시선은 근명과 하연의 자리로 쏠렸지만, 달래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근명은 하연의 대성통곡을 그저 재밌다는 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욕조에 거품제를 넣어 거품제가 그득해진 덕분에, 혜미와 윤지는 그야말로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비누 방울도 만들어보며 천천히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이리, 돌아앉아봐.”



윤지가 시키는 대로, 윤지에게 등을 보인 채 앉은 혜미는 이내 느껴지는 부드러운 솔의 느낌에

저절로 눈이 감기는 것만 같았다. 타월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드러웠고, 야릇했기 때문이었다.



“아, 부드럽다…뭐야 지금 그건?”



“어어, 그냥 뭐. 좀 좋은 타월 같은 거야.”



실은 남자들을 흥분케 하는데 효과적으로 쓰이는, 동물들의 희귀한 털만으로 만들어진 타월이라는 말은

윤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미는 윤지가 닦아주고 있는 등으로부터 이상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을 느껴가고 있었다.



“어때? 기분 좋아?”



“으응…근데 있지…나 쉬 마려운 거 같애…”



혜미의 말에 둘은 동시에 키득거렸지만, 윤지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이내 등만 닦아주던 타월을

조금씩 앞쪽으로 옮겨가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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