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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록 아름다운 - 23부

관리자 0 3661
다음 주 화요일. 학원이 끝난 찬승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요즘 왠지 학원에서 미경이와의 사이가 예전만큼 좋지 않았다. 아니 찬승은 예전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건넸지만, 미경은 예전만큼의 미소나 이야기는 찬승에게 건네주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찬승이 건네는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 민조에 관련된 자랑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찬승이 그런 이야기를 듣는 미경의 마음이 어떨지 전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찬승은 그런 미경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행복하니까…. 민조와 키스를 한 그날 이후 찬승은 너무나도 행복하기에 주위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그저 매일을 민조의 연분홍빛 입술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망상으로 빠질 뿐이었다.

그날 역시 민조와의 키스를 떠올리며 집으로 향하던 도중 아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선배애! 어디세요?]



“응? 나 학원 끝나고 집에 가고 있어.”



[선배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없어요! 게다가 우리 집에 잘 오지도 않고…. 힝. 무슨 일 있어요?]



괜스레 뜨끔 하는 찬승.



“응, 응? 아니 별 일 없어….”



[킥킥. 선배! …우리 집에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킥킥거리며 말한 아영은 혼자 할 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잠시간을 멍하니 있던 찬승은 끊어진 핸드폰을 닫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말할 때가 됐구나….’



찬승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냥 얘기하면 되는 거잖아…. 그냥 여자친구 생겼다고 얘기하면 되는 건데 뭐가 이렇게 떨려…. 긴장할 거 없잖아….



*



종로에서 찬승의 집 까지 가는 버스는 내리지 않고 조금 더 가다보면 아영이 사는 곳까지 가기도 한다. 그래서 찬승은 자신이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 아영이 사는 곳에서 내렸다.



‘이제 이 길도 익숙하구나….’



돈암역은 여대의 앞인데다 고등학생들도 많이 놀러오는 곳이라 꽤 북적이는 거리다. 많은 사람들을 뚫고 대학가 쪽으로 가다 보면 사람들이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그 근처 건물에 아영이 사는 곳이 있다. 그곳에 도착한 찬승은 2층을 올려다봤다. 반쯤 열려진 창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아영이 사는 곳이었다.



‘…날 기다리고 있겠지.’



한 번 깊게 심호흡을 한 찬승은 천천히 건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방문을 두드리자 아영이 반갑게 맞아준다.



“선배애! 어서오세요.”



“응…. 안녕.”



방으로 들어가는 찬승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그런 찬승의 표정을 본 아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응? 선배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으세요?”



살짝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 이제 말해야 한다. 그러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 왜 이렇게 말하기가 힘들지? 어차피 얘는 나랑 즐기려고 하는 건데 내가 여자친구 생겼다는 걸 이야기해도 별 상관없잖아? 근데 왜 이렇게 이야기하기가 힘들지…?’



찬승이 아무 말이 없자 아영이 한 번 더 묻는다.



“선배…? 왜 그러세요?”



“…저기 아영아. 나 여자친구 생겼어. 그래서 이제 너랑 그…거 못할 거 같아. 여자친구한테 미안해서….”



드디어 말하고 말았다….

찬승의 이야기를 듣고 난 아영이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하, 하…. 누, 누구요? 지현이? 미경이?”



“아, 아니…. 다른 과에 02학번 여자애 있어….”



찬승은 말해 놓고 고개를 숙였다. 왜 고개를 숙이는지 자신도 몰랐다. 그러나 아영의 얼굴을 보기가 왠지 두렵다.

잠시간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그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찬승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입술을 꼭 깨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왜?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나한테 여자친구 생겼으면 축하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근데 왜…. 너 설마….’



“…저 가지고 놀았어요?”



부들부들 떨고 있던 아영이 쥐어짜듯 내뱉었다.



“뭐…?”



“난…. 나는! 선배가 술 취해서 내가 생각났다고 나 찾아오고! 제가 하자는 거 거부하지 않고 허락해서….”



아영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나, 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다시 고개를 든 아영의 여우같은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현실이 되었다. 지현이가 찬승 선배와 놀지 않고 다른 남자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이 현실이 되어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때는 그저 그러한 불안감에 휩싸이지 말고 현실을 즐기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제가…. 제가 그렇게 예쁘고 섹시하다면서요. 저랑 한 거 좋았다면서요. 예? 그냥, 그냥 그것 뿐 이예요? 외모만? 섹스만? 전 그냥 선배 좆물만 받는 여자였나요?”



“아영아….”



찬승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했구나….

아니. 아니다…. 왜? 왜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주저했을까? 그저 자신을 즐기는 상대로 생각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최면을 걸었는데…. 말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것이 어쩌면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녀에게 말하기가 두렵고 미안했던 것일까?



“나, 나는….”



찬승은 차마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 미안해….”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딱히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로 그녀에게 사과를 하지만 그것이 한 없이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



“다 필요 없어요. 그 선배가 말한 사람 제가 만나야겠어요.”



“뭐, 뭐?”



당황한 찬승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 선배가 말한 사람 얼마나 잘났는지 봐야겠다고요.”



“아, 아영아….”



“걱정 말아요. 별말 안할 거예요. 단지 어떤 여잔지 보고 싶은 거니까….”



“저, 저기….”



찬승은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나가요.”



“응?”



“나가라고요! 혼자 있고 싶으니까!”



거칠게 소리를 지르는 아영의 말에 찬승은 힘없이 그녀의 방을 나와야 했다.

혼자가 된 방안.

힘겹게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서 있던 아영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억지로 참고 참았던 눈물을 일시에 터트리고 만다.



“흑…!”



…알고 있었다. 아영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선배가 자신을 섹스파트너와 학교 후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여자로 생각할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분명히 찬승을 좋아함에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럼 부담감을 느낀 선배가 떠나갈까 봐, 자신에게서 멀어질까 봐 고백도 못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런 날이 오고만 것이다.

그저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도, 알아주지 않아도 되니 그저 이 선배와 관계를 가지며 행복해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선배는 자신에게 그런 관계를 그만 둘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이 선배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선배의 감성에 호소해 자신을 좋아해서 계속 관계를 가졌다고 우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만 비참해져갔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명백한 자신의 잘못. 애초에 섹스파트너로 허락한 것은 자신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 섹스파트너인 선배를 좋아하게 된 자신의 잘못. 그냥 즐기면 될 상대에게 마음을 준 자신의 잘못인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저 선배와 헤어지기 싫었다.

그 여자…. 선배가 말하는 그 여자친구를 한 번 보고 싶었다.



*



쫓기듯 아영의 집에서 나와 돈암의 거리로 나온 찬승.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방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별 이상 없이 불이 켜져 있는 그녀의 방….



‘제길…!’



고개를 푹 숙이는 찬승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괴롭다.



“후우….”



고개를 든 찬승은 돈암의 밤거리를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그런 찬승을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래 전부터 왠지 이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영을 찾아가는 일이 미안하게 느껴질 때부터…. 그때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마음 속 한구석에서 경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꼈으니까…. 그러나 찬승의 마음은 그녀를 이성으로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할 수 없었다. 착하고 예쁜 후배인 것만은 분명했지만 이성으로서 끌리는 매력은 찬승에게만은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녀를 찾아가지 말아야 했을까? 아니.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녀도 처음에는 분명 자신을 즐기는 상대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찾아가는 것이 부담스럽고 미안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으면 가지 말아야 했다. 끝까지 참았어야 했지만 남자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간 것이 결국 이런 사태까지 몰고 오고만 것이다.

방금 전 아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난…. 나는! 선배가 술 취해서 내가 생각났다고 나 찾아오고! 제가 하자는 거 거부하지 않고 허락해서…. …나, 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결국 찬승 자신이 행동을 확실히 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찬승은 눈을 꼭 감았다.

정말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



다음 날.

찬승은 전화를 끊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민조에게 전화한 것이다. 수업 끝나고 대학로에 있는 카페에서 보자고…. 자세한 건 이따 알려주겠다고 그렇게만 말했다. 아영이에게서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학로에 있는 카페에서 보기로….

찬승은 지금 굉장히 복잡한 심정이었다. 어제 이 일로 고민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결국 실현되고야 만 것이다.

찬승은 자신 스스로가 간사하고 못됐다고 생각되었다. 아영에게 미안하면서도 혹시 그녀가 민조에게 무슨 엉뚱한 행동이나 말은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녀에게 미안해도 사랑에 빠진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였기에 생각이 편파적일 수밖에 없는 찬승이었다.



‘별일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별일 없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아영이는 그런 여자애가 아니니까….



찬승은 수업이 끝나고 대학로로 갔다. 수업이 먼저 끝난 민조는 친구와 대학로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를 보내고 찬승을 만난 민조는 자세한 건 이따 알려주겠다는 아까의 말이 궁금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흑진주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민조의 질문에 찬승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별일 없어. 그냥 친하게 지내는 우리 과 후배 여자애 있거든? 내가 여자친구 생겼다고 말하니까 너 보고 싶다고 그래서.”



“아. 그래? 그럼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지.”



“응, 응.”



찬승은 긴장을 하며 아영을 기다렸다. 옆에 앉은 민조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찬승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뿐이었다.



잠시 후 아영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아영은 찬승의 생각과 다르게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찬승의 옆에 앉은 민조에게도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찬승 선배 같은 과 후배예요. 04학번 홍아영입니다.”



아영의 밝은 인사에 민조도 웃으며 인사했다.



“예. 안녕하세요. 디예과 02학번 한민조입니다.”



옆에서 둘의 인사를 지켜보던 찬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분위기가 나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영은 민조와 찬승의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와-! 근데 정말 너무 예쁘시네요!”



밝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아영의 얼굴엔 정말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 진심어린 칭찬을 받고 좋아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 민조도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을 했다.



“아니에요. 아영 후배가 훨씬 예쁜데요. 찬승이한테 이렇게 예쁜 후배가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찬승 선배가 제 얘기 안했어요? 에이…. 선배 실망이다.”



아영은 갑자기 찬승에게 화살을 돌렸다. 조심스레 앉아 있던 찬승은 당황하며 말했다.



“응? 응? 미, 미안….”



그러나 아영은 피식 웃으며 다시 민조에게 말했다.



“선배는 저한테 언니 얘기 되게 많이 했는데….”



“정말요?”



민조가 놀랍다는 듯 흑진주 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찬승도 너무나도 놀라 속으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올 것이 왔구나. 찬승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녀에게 민조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녀가 지금 하려는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히 그녀와 자신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찬승은 마른 침을 삼키며 서서히 열리는 아영의 입을 주목했다. 이제 아영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세 사람의 입장이 결정될 것이다.



“…예. 선배가 학교에서 저 만나면 항상 언니 자랑만 해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히힛. 얼마나 들었는지 귀가 다 따갑다니까요.”



아영의 말에 민조가 찬승을 웃으며 바라본다. 그러나 찬승은 민조를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영의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고 항상 저한테 이런 말을 해요. 나중에 언니랑 손 붙잡고 학교를 거닐고 싶다고…. 또 손 꼭 붙잡고 영화도 보고, 근사한데서 저녁도 함께 먹고. 늦은 밤 집에 바래다주고, 서로 잠들기 전에 통화하고. 히힛. 서점에서 같이 책 읽어도 보고, 목걸이 예쁜 것 사서 채워주고 싶고…. 학교에서 같이 수업도 듣고, 함께 아이스크림 먹고 싶고. 가끔 수업 빠지고 사람 없는 공원 같은데 단 둘이 산책하고 싶고. 그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캔맥주 사서 함께 마시며 이야기 하고…. 킥킥!”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하던 아영은 갑자기 킥킥 웃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말을 잇는다.



“…너무 많아서…. 선배가 언니랑 하고 싶다고 말한 게 너무 많아서 다 기억을 못하겠네요. 그래도 몇 개는 해봤다고 좋아하더라구요. 바보처럼….”



뒤의 바보처럼은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기에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아영의 말을 들은 민조는 찬승을 바라봤다. 정말 너가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는 뜻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절대 이런 말 한 적이 없는 찬승이었지만 아영과 말을 맞추기 위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민조는 왠지 감동을 받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다.

아영은 그런 둘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 여자…. 한민조라는 여자. 정말 찬승이 푹 빠질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처음 카페에 들어서 찬승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는 놀란 기색을 감추느라 꽤나 애를 써야 했다. 우리 학교에 저렇게 예쁜 여자가 있었다니….

아영은 왠지 잘 어울리는 둘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그 후 아영은 소소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약속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조가 역까지 데려다주라고 해서 찬승도 같이 일어나게 되었다.

카페 계단을 내려가던 찬승이 앞에 가는 아영을 불러 세웠다.



“저, 저기….”



그러자 앞서 계단을 내려가던 아영이 멈춰서며 뒤를 돌아본다.



“예? 왜요?”



“미, 미안….”



찬승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너무나도 미안해서 그녀를 바라볼 면목이 없다. 게다가 자신을 이해해준 그녀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마음씨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영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찬승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곤 다시 계단을 올라와 찬승의 옆에 선다.



“왜 그래요? 선배. 뭐가 미안해요….”



아영은 찬승을 살짝 안는다. 그러자 찬승의 참고 참았던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진다. 아영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우는 찬승….



“미안해. 미안해. 정말 너무 미안해. 미안해. 아영아. 미안해….”



연신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중얼거린다.

아영은 그런 찬승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선배. 괜찮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울지 마세요. 제발….”



아영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애써 환하게 웃으며 찬승을 다독일 뿐이었다. 아영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찬승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린애 같이 울긴 왜 울어요….”



겨우 눈물을 멈추고는 훌쩍이며 아영을 바라보는 찬승…. 그런 찬승을 보며 아영이 환하게 웃는다.



“선배랑 그 언니…. 정말 너무 잘 어울려요.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아영은 찬승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꼭 잘해보세요.”



건물 밖으로 나온 아영은 그제 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아직 날은 밝았기에 대학로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예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걷고 있는 아영을 이상스레 바라보았다. 게다가 자꾸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로 인해 눈 주위의 화장이 시커멓게 번져 괴상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맞는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



“데려다 주고 왔어?”



“응? 응….”



화장실까지 들려 깨끗하게 눈물을 닦아 내고 온 찬승. 하지만 눈물을 흘리고 나면 약간의 흔적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 너 울었니?”



눈과 코 부근이 약간 빨간 것을 발견한 민조가 놀라 물었다. 그러나 찬승은 태연하게 웃었다.



“아냐. 아냐. 눈에 뭐 들어가서 화장실에서 눈 비비고, 물로 씻고 난리 치다 왔어….”



“아아.”



찬승의 말에 민조가 다행이라는 듯 웃는다. 그러나 이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찬승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혹시 아까 그 후배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왜, 왜?”



“그냥. 왠지 그런 느낌이 들던데….”



“아냐. 아냐. 에이 설마….”



급하게 손을 휘젓는 찬승을 보며 민조가 웃었다.



“푸훗. 왠지 너 너네 과에서 인기가 있을 것 같단 말야.”



“아냐. 아냐. 그런 일 없어….”



“히힛. 그래. 그리고 나랑 하고 싶은 일이 그렇게 많았니?”



민조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묻는다. 찬승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아까 아영이 했던 말임을 떠올렸다.



“…아! 맞아. 응. 그래. 하고 싶은 일이 많았어….”



“핏. 그럼 나한테 말하면 되지 뭘 후배한테 말하니.”



“미, 미안.”



“헤…. 그럼 오늘은 너가 하고 싶었던 일들 중에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어 볼까?”



“근사한 곳? 어디?”



“너 알바하는 레스토랑. 거기 맛있더라.”



민조의 말에 찬승은 깜짝 놀랐다.



“윽! 거기 가면 아르바이트하는 형들이 놀릴 텐데.”



“내가 부끄럽니!”



짐짓 화내는 척하는 민조에게 찬승은 쩔쩔매며 부정해야 했다.



“아냐! 아냐! 가자.”



“히힛. 그래 가자.”



민조는 환하게 웃으며 찬승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



다음 날 학원에 간 찬승에게 미경이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선배. 그거 아세요?”



“뭘?”



가방을 푸는 찬승에게 미경이 던진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아영이… 휴학했어요.”



“뭐? 진짜?”



“예…. 전화번호도 바꿨는지 연락도 안 돼요.”



“그, 근데 아직도 휴학이 되니?”



“9월 달까지는 할 수 있어요.”



아영의 소식을 들은 찬승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반면 찬승의 눈치를 살피던 미경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분명히 지현이나 자신에게 했던 그 여자친구 이야기를 했겠지…. 그리고 아영이랑은 그런 관계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을 테고….

미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자신이 지현처럼 다른 사람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 찬승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만약 자신이 아영처럼 찬승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때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자신은 그래도 선배를 좋아했을 것 같았다. 왜 그런지 몰랐다. 솔직히 말해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선배인데 이상하게 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없다.



‘혼자 몰래 좋아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미경은 핸드백에서 안경을 꺼내 착용하며 조용히 책을 폈다.



*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찬승은 핸드폰을 꺼내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살폈다. 홍아영…. 여전히 변함없이 저장되어 있는 그녀의 번호.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없는 번호라고 알려주는 친절한 여자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후우….”



찬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종로에서 출발한 버스는 천천히 혜화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대로 혜화를 지나쳐 조금 가다보면 그녀가 사는 돈암역까지 가게 된다.



‘한 번 찾아가볼까….’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린 찬승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미 없을 것 같았다. 아니 혹시 있다고 해도 찾아가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이름 알아서 뭐하게? 그냥 야라고 불러.]



나이트에서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엄청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옆에 앉았다고 좋아하며 유난을 떨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그날 그 여자와 하룻밤을 함께 하게 되었다.



[뭐야. 그럼 너 여기 학교 법학과야?]



과실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무척 놀라던 그녀. 쪽팔려하며 아는 체 하지 말자고 쏘아붙이고 돌아서던 그녀….



[안 보여주면 계속 만질 거예요. 그럼 우리 둘 다 걸릴걸요. 우리 둘이 같이 F 받아요.]



그러나 그녀는 당돌하게도 중간고사에서 자신의 엉뚱한 곳을 만지며 협박을 가했다. 결국 시험지를 보여줬고 그녀와 다시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떠올랐나요? 다른 사람보다 제가 가장 먼저?]



무작정 찾아간 자신에게 자기가 가장 먼저 떠올랐냐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던 그녀. 그러나 지현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선배 필름이 끊겼는데 저를 찾아온 걸 보면 저랑 정말 하고 싶었나 봐요.]



[하아…. 선배. 저 기다리느라 죽을 뻔했어요. 어서 오세요….]



[선배. 말해 봐요. 괜찮아요. 아까 그래서 무슨 상상했어요?]



[히히. 어서 오세요.]



[선배! 또 저 보고 싶어서 오셨군요!]



그리고 그 후 술에 취해 찾아가도, 다른 여자가 생각나서 찾아가도 항상 환하게 웃으며, 철없이 좋아하며 받아주던 그녀의 모습들….

찬승은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던 도중 예전의 한 사건에 생각이 미쳤다.



[선배! 선배! 너무…. 너무너무 좋아해요!]



자신을 좋아한다고 소리 높이 외쳐 부르던 그녀…. 그때는 그냥 잘못 나온 말이라고 흘려 넘겼었다. 그러나 그때부터였을까. 그녀에게 무의식중으로 부담을 느끼게 된 것이….

그때 찬승의 뇌리에 무언가가 번쩍인다.



[그리고…. 그리고 항상 저한테 이런 말을 해요. 나중에 언니랑 손 붙잡고 학교를 거닐고 싶다고…. 또 손 꼭 붙잡고 영화도 보고, 근사한데서 저녁도 함께 먹고. 늦은 밤 집에 바래다주고, 서로 잠들기 전에 통화하고. 히힛. 서점에서 같이 책 읽어도 보고, 목걸이 예쁜 것 사서 채워주고 싶고…. 학교에서 같이 수업도 듣고, 함께 아이스크림 먹고 싶고. 가끔 수업 빠지고 사람 없는 공원 같은데 단 둘이 산책하고 싶고. 그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캔맥주 사서 함께 마시며 이야기 하고…. 킥킥!]



“아….”



아영이 했던 말. 찬승이 민조 이야기를 하며 자신에게 늘어놓았다고 했던 말들…. 찬승은 그런 말들을 한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마치 준비라도 해온 듯 너무나도 쉽게 줄줄이 내뱉었었다.



[…너무 많아서…. 선배가 언니랑 하고 싶다고 말한 게 너무 많아서 다 기억을 못하겠네요. 그래도 몇 개는 해봤다고 좋아하더라구요. 바보처럼….]



몇 개는 해봤다고 좋아하더라구요….

그녀와 영화를 보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녀와 서점에서 같이 책을 읽은 일이 생각난다.

그녀에게 목걸이를 채워준 것이 생각난다.

그녀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이 생각난다.

결국 그녀는 그녀 자신이 찬승과 하고 싶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이야기 한 것이었다.

잠자기 전 불을 끄고 이불에 누워 만약 선배와 사귄다면 무엇을 할까? 라고 밤늦도록 생각했던 일들….

감히 사귀자고 말은 못했기에 꿈에서 몇 번이고 데이트를 즐기며 나왔던 일들….

가끔 선배와 진한 스킨십만이 아닌 정말 연인처럼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남몰래 눈물 흘리며 생각했던 일들….

그런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던 것이다.

찬승은 또 다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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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맞는 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만약 누군가와 마음이 맞는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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