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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로리 - 18부

관리자 0 2046


17. 노리야 학교가자 (전편)





…그것은 아직 따뜻한 봄볕이 재수없는 여름의 열기로 변하기 직전의 어느 날의 일이었다.

나는 이제 슬슬 익숙해지려는 옥상의 한켠에서 퍼질러 앉아, 물개가 졸듯이 자고 있었다.

원래는 담배 한 대 빨고 가려던 것이, 따스한 햇살을 비스듬히 받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순간 인기척이 느껴져, 몸을 숨겼다.

수많은 대련-아니 그보다는 이런저런 싸움-을 통해 길러진 야생의 느낌은 참 편리하다.

뜯지도 않은 담배갑의 비닐 위로 내 손에서 배어나온 땀이 촉촉하다.



(……?)



옥상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다행히도 담탱이나 학주는 아니었다.

들어온 아이는 아직 교복이 선명한 1학년…

저 옆 모습은 낯이 익은걸. 분명 우리 반이다.

그래, 항상 창 밖을 바라보던 애다.



교실 한구석에서 항상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뭔가 어둡긴 하지만 꽤나 귀여운 얼굴이다.

담에 몸을 기댄 그녀의 머리가 간헐적으로 팔랑팔랑 흩날린다.



…어떻게 하지.

슬슬 내려가고 싶은데, 지금 저 애 앞에 나타나기엔 뭔가 굉장히 어색하다.

아니, 그보다 저 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아씨, 뛰어내리기라도 하는 거 아냐?



“우… 우우…”



가볍게 깨문 입술과 함께, 하얀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우으… 아함~”

(…….)



……하품?



“아웅…”



작은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하품하던 그녀는 곧 입을 가리더니, 아무도 없는(나 빼고) 옥상을 지레 휘휘 둘러보더니 머쓱한 얼굴을 하고 내려간다.

…걘 아마 모르겠지.

쓸데없이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내가 OTL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을…



……

……



“하아아암~ 아웅.”



그 때 그 아이는 지금 내 품 안에서 그 때처럼 하품하고 있다.

작은 강아지처럼.



“졸려?”

“으응. 올간만에 공부할래니 힘들어…히잉.”

“…공부?”



이제 몇 주만 있으면 고3이긴 하지만, 나나 마찬가지로 공부 안하던 노리한테서 이런 얘기가 나오다니. 어색함을 넘어 신기하다.



“요새 별로 수업도 안 하잖아.”

“아니, 나 과외 시작했거덩.”

“과외?”

“응. 그거 숙제하느라 잠이 부족해...”



역시 부자집 딸내미. 급하니까 집에서 과외를 붙인 모양이군.



“야, 그래도 딸 대학 보낼 생각은 하는구나. 니네 엄마. 다시 봤다.”

“아니 엄마가 시킨 게 아니라… 그냥 하게 됐어.”

“…?? 그게 무슨 얘기야?”

“아우 몰라. 나중에 얘기해 줄게. 좀 복잡해.”



뭘까.



“야, 고3 되기도 전에 너무 무리하지 마라. 안하던 거 하다 몸 버릴라.”

“으응.”

“고3이라… 이번엔 같은 반 되면 좋겠다.”

“그러게.”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을 때는 참 즐거웠는데.



……

……



…창 밖 풍경이 울긋불긋하게 변했을 때쯤엔,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은 내게 꽤나 익숙해져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교정에 서 있던 나무와 같이.



(바깥 좀 그만 봐라 나뭇잎 닳겠다-_-)



내 자리는 그녀와 별로 멀지 않았기에, 쪽지를 던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안돼 너무 이뻐 ㅎㅎ)



애도 참…

후다닥 또 쪽지를 써서 던지려는 찰나에, 수학샘이랑 눈이 딱 마주쳤다.



“거기 너, 그 쪽지 갖구 나와라.”

“……!!”



난 순간적으로 쪽지 일부를 찢었지만, 후딱 다가온 수학샘한테 대부분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쪽지 누구랑 주고받던 거야?”

“…….”

“…저, 저에요.”



으악.

노리가 얼굴이 하얗게 되어 바로 일어선다.

야, 너 가만히 있지 쫌…



“어디 보자…응?”



내 얼굴이 붉어진 것은 안 봐도 뻔하다.

제발, 제발 읽지 말아줘…



“…이뻐? 뭐가 이쁘단 얘기냐?”

“나, 단풍이요.”

“자, 내 특별히 니들 이쁜 단풍낙엽 실컷 보게 해 줄 테니 그리 알고, 복도 가서 서 있어라.”



……



“…뭐라고 썼던 거야?”

“으응…뭐. 단풍이 이쁘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내게 노리가 물었다.

사실은 앞부분의 ‘네가 더’를 찢어내긴 했다만…



“정말 이쁘지…”

“으응.”



십년 감수한 내 마음은 모르는 채, 노리가 다시 복도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그 해의 단풍은 참으로 고왔다.



……

……



“같은 반 안 되어도 뭐, 자주 볼 수 있잖아. 걱정 마.”

“그래…”

“전화나 끊어버리지 말라구. 지난 학기처럼…”

“에이, 알았어… 아, 모임엔 안 나올거야? 몇 달째 안 나오던데.”

“어… 그거.”



갑자기 노리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안 나갈거야. 미안.”

“아니… 나한테 미안할 건 없는데… 왜? 공부하느라?”

“어 그것두 있구… 좀 그래.”

“……? 나랑 같이 가도?”

“응. 나중에 말해 줄게.”

“뭐냐. 오늘… 전부 나중에, 나중에.”



난 짐짓 화난 듯이 감싸 안고 있던 노리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가볍게 밀었다.

그녀가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 다시 붙는다.



“은진아 미안… 진짜 나중에 말해줄게. 꼭이야.”

“뭐, 그래…”

“흠흠… 음, 요새도 진짜 담배 안 피나 보네?”

“어… 뭐.”



내 몸에 붙던 노리가 킁킁거리며 옷 냄새를 맡는다.

하하. 진짜 강아지 같애.

와, 생각해 보니 끊은지도 1년이 넘었군… 분명 재작년 연말부터였지.



……

……



“후우…….”



…파장 분위기인 ‘모임’에서 빠져나와, 건물 뒤켠에 기대어 가만히 담배를 빨았다.

지난번에 어떤 개념없는 것들이 근처에서 불내는 바람에, 실내금연약속 안 하면 ‘모임’ 장소를 빌리지도 못하게 되었다. 캬~ 참다가 빨아주는 이 각별함…

…이라기보다는, 썅, 귀찮아 죽겠네. 찬 공기를 타고 흰 연기가 번져 나간다.



“여기 있었네, 준영이도 없고 해서 어디 갔나 했어.”

“응… 좀, 헤헤.”



어느새 노리가 쫓아 나와 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지만, 아빠랑 언니들의 구박을 감수하고 빠져나와 ‘모임’을 가졌다.

눈치를 보니, 노리가 꽤나 쓸쓸해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후환이 좀 두렵긴 하지만, 잘 한 것 같다.



“은진아.”

“(피유~) 응…?”

“저기, 나도 그거 해 보면 안돼?”

“…뭐?”

‘담배….”



…….

아니, 저기, 이 상황은…

그러니까 지금 노리 얘가 나한테 담배를 달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지.



“안돼…?”

“아니, 너 펴본 적 있어?”

“없는데…”

“그럼 안돼.”



노리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좋지도 않은 거 왜 하냐.”

“그럼 은진이 넌 왜…”

“나야 뭐 그냥…”



답이 좀 궁한데, 할 수 없다.

사실 ‘모임’에서 왠만한 애들은 다 피고 있긴 한데… 얘가 피는 건 왠지 싫다.



“난 그냥… 너 피고 있는 게 멋있어 보여서, 해 보고 싶었던 건데…”

“…….”



…순간 담배갑째 내줄 뻔 했다.



“…피, 피워봤자 목만 아퍼. 나 오늘부터 끊을 거였어.”

“진짜…?”

“사람 말을 못 믿냐…?”



난 반 넘게 남은 디스를 꺼내서 휴지통에 던졌다.



“봤지? 에이, 쓸데 없는 데 관심 갖지 말고, 그만 집에나 가자.”

“아, 으응… 나 화장실 잠깐…”

“응.”



……



아 씨댕… 이 휴지통 왜 이렇게 깊은 거야…



“웃겨 돌아가시겠다. 아이고… 홍은진… 뭐하는 거냐?”

“……?!”



어느샌가 준영이 뒤에 서 있다.

이런, 담배에 정신이 팔려 이 덩치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군.



“…뭐, 뭐가.”

“걔가 네 동생이라도 되냐? 아님 너…”

“와~~!!! 너, 너, 조용히 안할래…?”

“아이고 무서워라~ 큭큭…”

“…….”



이 녀석은 중학교 때부터 알던 녀석으로, 나와 같이 ‘모임’의 핵심이다.

착실한 녀석은 못 되지만, 나름대로 의리도 있고 한 주먹 하는 남자다.

노리 데려온 뒤로 침흘리며 따라오는 걸 뺀다면야… 뭐.



“그래서, 진짜 끊을거냐? 담배…”

“아이씨, 잠깐 생각 좀 해보고…”



아오, 이런 건 한 대 빨면서 생각해 봐야 되는 건데…



“내가 너 담배 끊는 걸 못 보고 뜨게 되서 유감이다.”

“언제 간다고?”

“해 넘기기 전에. 담주 월요일에 뜬다.”



결국 도피유학 뜨는군.

그래도 꽤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나머지 별 볼일 없는 녀석들에 비하면…



“왜, 서운하냐? 하긴 서운하겠지. 나 같은 남자를 보내려면…”

“지롤하네. 야야, 거기선 조용히 살아라. 어?”

“야, 여기선 조용히 안 살았냐?”

“하하하.”



……

……



“벌써 1년도 더 됐다니 믿겨지지가 않는다니까.”

“그러게 말이다. 담배 끊고 가끔 손 떨리던 거 생각하면…”

“아아니, 담배 말구 준영이 말야.”

“아, 걔.”

“너무해 은진이는~ 잊어버린 거야?”



노리가 날 야속하다는 눈길로 올려다본다.

뭐, 잊어버렸다고는 못 하지만… 그 녀석.



……

……



준영이 녀석이 뜨던 날, 점심시간에 노리가 다가와 말했다.



“은진아, 그거 알아? 오늘 8시 비행기래.”

“뭐가? 아아, 준영이 뜨는 거? 알어.”

“전송해 줘야 되지 않아…?”

“전송? 에이, 야. 지난번에 보고 빠빠이 다 했네.”

“아니 그래도…”

“…너 걔 보내려니까 서운하냐? 혹시…”



얼굴이 빨개지면서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는 노리.



“아유~!! 그게 아니라~~~!!! 좌우간 삼성역 도심공항터미널까지 오늘 가는 거야…? 인천공항도 아닌데 좀 가주라.”

“으~음… 뭐, 노리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가 주지.”



뭐야, 노리 얘 준영이 좋아했나? 도대체…

…뭐, 올 저녁에 뜰 녀석이니 그 정도는 봐 줄까…



……



전화를 걸 필요도 없이, 우리는 터미널 2층에서 쉽게 준영을 찾을 수 있었다.

큰 여행가방 두 개 위에 다리를 걸쳐 놓은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녀석은, 나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냐 너? 지난번에 잘가라고 다 해 놓구선. 응? 어, 노리도 왔네~~!! 하하.”

“야이씨, 내가 할 말이다. 뭐냐? 그 대놓고 돌변하는 태도는.”

“자식, 내 맘이다.”

“이딴 자식을 전송하러 나와야 하다니… 쳇.”

“하하.”



예의 피식거리는 웃음을 보이는 준영이 녀석.

바다 너머 알지 못하는 곳에 가서도 저런 식으로 웃겠지. 저러다 덩치 더 큰 미국넘들한테 얻어터지는 거 아녀.



그런데 문득, 녀석의 등 뒤 유리벽을 통해 노리의 모습이 비쳤다.

V자 사인을 그리고 있는…



“응? 뭐하냐 노리 너?”

“아? 아, 아니야 암것두. 히히.”

“좌우간 너 노리한테나 감사해라. 네가 뭐가 이쁜지 여기까지… 거기다 나까지 덤으로 끌고 나왔다.”

“땡쓰 노리.”

“뭐얼, 어… 가족들은 안 나왔어? 너 혼자야?”

“뭐, 평일에 여기까지 전송 나올 가족이면 이렇게 나 안 보내지. 하하.”

“…….”

“…….”



우리는 잠시 말을 잊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참지 못했는지, 노리가 입을 연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엉. 야, 너 어딘지 아러? 같이 갈까?”

“웅... 괜찮아. 준영이랑 같이 있어.”



……



터미널 2층에서 준영과 이것저것 잡담을 하고 있는데…

화장실 간 애가 20분이 넘어도 오지 않는다. 이런,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걱정되면 전화해보지 그래.”

“어, 그럴까?”



뭔가 얘기하던 준영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한 마디 한다.

바로 전화기를 꺼내는데 찍히는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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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화장실못찾다가

이제들어가니까걱

정하지마조금있다

갈게-Noliloli-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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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어떻게 화장실 하나 못 찾냐… 역시 내가 같이 갔어야 되나.



“그렇게 걱정되냐?”

“아니 뭐…”

“너무 그러지 마라. 그러다가 너 없어지면 쟤 힘들거야.”

“걱정 마쇼. 난 누구처럼 집에서 도피유학 안 보내니까.”

“자식 끝까지 말 하는 거 하곤… 나 간다.”

“어 가냐?”

“음. 지금 공항 가는 버스 타야 돼.”

“노리 올 때까지 못 기다리냐? 야야, 좋아하던 애 마지막으로 보고 가야지…!”

“아아…하하.”



녀석은 또 일없이 피식 웃는다.



“그냥 간다. 잘 있어.”

“그래... 잘 가라.”

“…….”



짐을 챙겨 들던 녀석이 뭔가 머뭇거린다.



“야, 홍은진.”

“왜.”

“뭐 더 해 줄 말 없냐? 잘 가라는 말 말고.”

“잉? 멀 바라냐… 오빠, 가지 마~ 이런 거 해 달라고? 엉?”

“…뭐. 그것도 괜찮겠군.”



이 자식이 갑자기 머리에 총맞았나…



“야야, 빨랑 가 버려라. 버스 뜬다.”

“……은진아.”

“……?”



녀석이 갑자기 장갑을 벗더니,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잡는다.



“뭐, 뭐야…?!”

“하하.”



굉장한 속도로 내 볼에 준영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녀석만의 허탈한 웃음과 함께.



“……!!”

“……젠장…”



녀석은 곧바로 고개를 돌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

……



“난 진짜 그 녀석이 노리 너 좋아하는 줄 알았단 말이야.”

“무슨… 너 진짜 그 때까지 몰랐던 거야?”

“아씨 그 때 말했자너… 깜짝 놀랐다고.”



…그래도, 자식 그렇게 소심할 줄은 몰랐다. 입술도 아니고, 그렇게 긴장하고서 한 짓이 볼에 뽀뽀하고 간 거라니. 1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웃음이 나온다.



“…좌우간 끝까지 웃기는 자식이었어.”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아참, 준영이가 이멜루 카드 보냈던데. 받았어?”

“어엉. 뭔가 잔뜩 써 보냈던데, 뭐, 살아 있나보다…했지.”

“에이, 너무해~”

“하하하.”



미안하다. 정준영.

미안하지만 네 녀석의 마음은 못 받아주시겠다.

난 벌써 임자가 있단다…

적어도 언젠가, 이 아이에게 남자가 생기는 그 날까지는 말이다.



“…노라.”

“응? 왜…?”

“아니야. 아무 것도. 하하.”



내게도 그 녀석의 피식거리는 웃음이 전염된 것인가.

그래, 그 녀석의 기분을 조금 알 것도 같다.



“후후…”

“……?”



어쨌거나, 그 날까지는… 네게 남친이 생기는 그 날까지는, 네 보호를 내게 맡겨줬으면 해 노라.

그게 언제가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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