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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 3부3장(1)

관리자 0 3475
제3화






샤워를 마친 유미가 잡옷으로 갈아입고 식탁에서 희성과 마주 앉았다.




“물.. 너무 뜨겁진 않았니?”




“아니..괜찮았어…”




희성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컵에 따라 내밀었다. 유미는 컵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낼 뿐이었다. 고개를 숙인채 희성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청순함이 느껴지는 투명해 보일 정도의 하얀 피부가 오늘은 웬지 핏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 희성은 가슴이 아파왔다.




“유미야.. 있잖아…”




“…응?”




고개를 숙인채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유미가 대답했다. 또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출장 따위 가지 않는 것이 옳았다. 왜 자신은 유미를 혼자두고…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지훈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자신의 책임이었다. 자신이 유미 옆에만 있었으면 이런 일은… 머리 속에서 되살아나는 조금 전의 유미의 알몸을 애써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쾌락에 겨워 떨리던 신음소리와 요염하게 몸을 뒤틀던 유미의 몸짓을 눈으로 보고 말았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도 희성의 가슴을 후벼파내고 있었다. 분명히 그 때 유미는 다른 남자에게, 지훈에게 안기글 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몸짓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유미는 그런 짓을 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랬는데.. 그 자식이 도대체 유미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자신이 지훈에게 원한을 산 탓으로, 자신 때문에 여자친구의 신상에 드리우고 만 악몽을 어떻게 하면 털어버릴 수 있을지 정답이 보이지가 않았다. 자신이 좀 더 확실히 유미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자식 얘긴데…”




유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자식..”




“그만! 부탁이야”




어쩌면 좋을지 몰랐지만 어떻든 넘어야 하는 시련이기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기로 했다. 지훈과의 관계를 다 털어놓고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희성이 꺼낸 첫 마디를 유미가 막았다. 긴 눈썹 아래로 보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있었다.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말아줘. 제발.. 지금은.. 아무 것도…”




“유미야”




“가르쳐 달라고 했으면서 듣고 싶지 않다는 거.. 내 멋대로인 거 알아. 하지만.. 하지만…”




유미의 가녀린 어깨가, 긴 손가락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서워.. 겁나.. 만약 시킨대로 하지 않은 것을 알면.. 나.. 이번엔.. 어떤 심한 짓을… 더 이상…”




꺼져 들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무섭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싫어.. 더 이상 이런 거.. 싫어… 나.. 미쳐버릴지도 몰라..”




몸을 웅크린 채 겁에 떨고 있는 모습 따위는 발랄하던 유미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밝고, 끊이지 않는 미소, 지기 싫어하는 탓에 적극적으로 매사에 임하던 유미의 그런 변모가 희성의 입을 다물게 하고 말았다. 얼마나 심한 일을 당했으면… 지금까지 당해 왔는지… 언제나 유미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째서….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을,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대가가 새삼 무겁게만 느껴졌다.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긴 침묵을 깨고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유미가 잠시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왜.. 희성이가 사과를 해?”




“응?”




“희성이는 아무 것도 잘못한 거 없잖아…”




의외의 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더 정신차렸어야 해. 지금 보다도 훨씬 더.. 그럼.. 그러니까 유미를 지켰으면.. 유미가 이런 일 따위 겪지 않았어도 됐어..”




“희성이는 그랬어.. 충분히.. 날… 그러니까 희성이가 잘못한 건 없어..”




“유미야…”




“내가.. 전부.. 내가 잘못한 거야…”




당황한 희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미의 손목에 남겨진 구속의 흔적을 유미는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내가.. 희성을 배신했던 거야..”




계속해서 지훈이가 신경이 쓰였었다. 희성과의 사이가 어색해졌을 때, 지훈과 데이트를 했고 몸을 허락했었다. 몇번이고 그만두려 했지만 그만두지 못하고 관계를 가져왔었다. 그날 이후로 지훈의 태도가 바뀌고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피할 수 없는 덫에 걸리고 만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되고 말았던 과정을 담담한 어조로 희성이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희성이 모르고 있었던 지훈과의 관계를 털어 놓았다.




“… 이제 알겠어? 희성아… 그러니까 희성이가 잘못한 건 없는 거야…”




말을 마친 유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려뜬 눈으로 슬쩍 희성을 바라 보았다. 희성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희성이가 잘못한 건 없어.. 잘못을 한 건.. 나니까..”




유미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 몰랐다. 오늘 같은 날, 털어놓게 되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하지만 희성이 그저 자신만을 탓하고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유미 자신을 심한 일을 당하고 만 천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렵혀지지 않은 깨끗한 우상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그런 자신만을 원하는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렵혀지고 깨어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최악의 형태로 전해지고 말았다.




“싫어졌지? 나 같은 거…”




“…싫어지다니..그럴 리가… 없잖아”




희성은 간신히 대답했다. 유미는 등을 돌린 채 방문 손잡이를 잡고 말을 꺼냈다.




“나.. 더 이상..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유미야!”




문을 열고 나가버린 듯한 유미의 기척에 당황한 희성의 부름에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유미야~ 유미야~~”




왜.. 유미가 그 자식을…? 몰래 만나고 있었다고…? 설마 그런 일이…








“여보세요? 유미야.. 제발 전화 좀 받아.. 얘기를 했으면 해..내가 할 수 있는 게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이걸로 벌써 몇번째인지도 몰랐다. 똑 같은 메시지를 자동 응답기에 남기고는 전화기를 책상위에 내려 놓았다. 충격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미팅을 하고 있어도, 무엇을 하고 있어도 문득문득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유미의 모습이 떠 올랐다. 사실을 이야기 한 이후로 마치 자신을 거부하는 것만 같았던 유미의 태도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 몰래 자신이 아닌 남자를 만났고, 그 남자와… 그 어느 사실도 믿기 어려웠다.




유미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니.. 거짓말.. 거짓말이 분명했다. 유미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왜…?”




아침 일찍 유미의 집을 들렀지만 학교를 가지 않겠다며 혼자 있게 해 달라는 유미의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였다. 그 이후로 전화도 받지 않았다. 쌓아왔던 관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한순간인 것만 같았다.




모니터 위를 흐르고 있던 숫자의 나열이 멈췄다. 입력해 두었던 수치의 에러 메시지가 나타났다. 키보드를 치워버리고 머리를 감싸고 한숨을 내 쉬었다. 아무리 해도 연구를 계속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유미야…”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같은 생각만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지훈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후회, 유미에 대한 초조함이 온통 뒤섞여 머리 속을 헤집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훈을 유미로부터 떼어놓을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섣불리 움직이면 또 유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자신의 무력함에 짜증만이 치밀어 올랐다.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언제 또 지훈이 유미 앞에 나타날지 몰랐다. 다시한번 지훈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가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더 이상 유미를 아프게 할 수는 없었다. 머리 속으로 지훈의 얼굴이 떠 오르고, 또 다시 그에게 안겨 있던 유미의 얼굴이 떠 올랐다.




“젠장!”




혼란스러운 유미는 그저 그날의 약속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유미를 지훈으로부터 구해내고 싶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힘이 되어주어야만 했다. 그것만을 생각했다. 그 밖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희성에게 있어서 유미는 그 모든 것이었기에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싫어질 리가 없었다. 유미 역시 정말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닐 터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전부 그 자식 때문이었다. 휴대폰에 걸린 마스코트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쥐고 있는 희성의 등 뒤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희성 오빠~”




지혜가 그렇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꼭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더 큰 일이 생기기 전에.. 꼭 오빠에게 말해야 할 거 같아서요.. 오빠?”




아무런 반응이 없는 희성이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지혜가 다가왔다.




“저기.. 오빠… 왜 그래요?”




고개를 숙인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대답한 희성의 표정을 살펴보기 위해 지혜가 옆으로 돌아왔다.




“응? 오..오빠.. 그 상처… 어떻게 된 거에요? 설마.. 지훈이가…”




지훈…? 그 빌어먹을 자식의 이름에 희성이 비로소 반응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채 낫지 않은 얼굴의 상처 이상으로 처음보는 일그러진 표정을 본 지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사였다. 어쩌면 벌써…?




“지훈이라니..? 어떻게 된 거지?”




유미선배를 망가뜨리는 것. 그걸 원했었다. 남자친구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도록, 남자친구 옆에 있을 수 없도록 엉망진창으로 더럽히고만 싶었다. 그랬기에 지훈의 제안을 수락하고 둘 사이를 찢어놓기 위해 희성에게 접근했었다. 하지만..




“지혜야!”




언제부터일까 그런 희성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희성을 속이고 있는 자신이 싫어졌었다.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이야기 해야만 했다. 자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경멸당한다고 해도, 두번 다시 희성이와 이야기 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사실을 이야기 하고 한시라도 빨리 유미를 지훈에게서 떼어놓아야만 했다. 늦어버리기 전에..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저.. 제가.. 오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지훈이가 유미선배를 노리고 있었어요.. 나.. 나는.. 걔한테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오빠한테 다가 갔던 거에요… 유미 선배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그리고.. 저… 지훈이랑 같이.. 유미선배 괴롭힌 적도… 있어요..”




믿을 수가 없었다. 희성의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어..어째서.. 그런 일을..”




“오빠를… 유미선배한테서.. 뺏고 싶었어요. 좋아했거든요.. 나만 볼 수 있도록…”




“뭐..뭐?”




할말을 잊었다. 희성은 놀라서 멍해진 채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려 깔았다. 지혜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지혜의 마음을 자신은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 정도는 알아줄 줄 알았다.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그런 지혜가 지훈과 짜고서 유미를… 지혜 마저 나를…




“그 자식한테.. 들었어.. 유미한테도… 나를 속였다더군…”




“아니에요. 그건 내가 꾸몄기 때문에… 잘못한 건 나에요.. 내가 한 짓… 용서 받지 못할 거라는 거 알아요..하지만.. 이대로 두면… 유미선배가 불쌍해요… 지훈이는.. 유미선배에게 못할 짓을 할 거라고.. 그게 목적이라고… 자세한 건 모르지만… 하지만 처음부터 그 목적으로..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에요.. 유미선배를 도와주세요”




“그만! 이제 그만!”




말을 막는 희성의 고함소리에 지혜는 몸을 움츠렸다. 지금 희성이로써는 지혜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자신도 유미를 돕고 싶었다. 유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닫고, 자신을 피하고 있는 유미에 대한 초조한 마음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지혜마저도 자신을 속였다고 하는 배신에 치가 떨렸다.




“나만..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복잡한 마음이 분노가 되어 마침내 터져버리고 말았다.




“꺼져버려! 지금 당장!”




치밀어오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거친 목소리로 지혜를 노려보고 있는 자신에게 스스로도 놀랐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초라해 보였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자신이 정신차리지 않으면 유미는… 다시 한번 기도하는 심정으로 휴대폰의 마스코트를 움켜 쥐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만 같았다.




“제가… 제가 도와드릴게요.. 지금부터라도.. 오빠…”




애원하는 지혜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일어선 희성이 지혜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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