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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 3부10장(1)

관리자 0 2822
제10화






그 방의 시간은 멈춰져 있었다. 한동안 닫혀져 있었던 탓에 방안의 공기가 탁했다. 개수대에 올려둔 채로 놓여 있는 사용된 식기들은 먼지에 쌓여 한동안 방안에 그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방에서 보냈던 즐거웠던 시간들, 따뜻한 추억들이 전부 함께 바람에 쓸려가버린 듯 해서 가슴이 아팠다.




“더 이상..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냐…”




커튼이 드리워진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유미는 전등도 켜지 않고 옷장의 서랍을 열었다. 밑에서 새어서 짝수는 희성이의 옷들이, 홀수에는 유미의 옷들이 들어가 있었다. 철지난 여름 옷들은 이미 치워둔 터였다. 겨울용 스웨터와 속옷, 스타킹 종류를 가져온 종이 봉투에 담아 들고 도망치듯 현관을 향했다. 치솔이나 찻잔, 슬리퍼 등의 일용품 종류도 치웠다. 이 방에는 더 이상 유미의 흔적이 남아 있지 말아야 했다. 잊어버린 것이 없는지 다시 뒤돌아 봤을 때 갑자기 가슴이 저며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안돼.. 그건… 가져갈 수 없는 거 잖아…”




이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어린시절부터 함께 해왔던 두 사람의 추억 뿐이었다. 복도로 나와 현관을 닫고 문을 잠궜다. 이 손잡이를 놓게 되면.. 유미는 그 더 이상… .




열쇄고리에서 희성의 집 열쇄를 빼어낸 유미가 조용히 안녕이라고 속삭이며 현관 아래쪽의 우편물 투입구로 열쇠를 떨어트렸다. 철컹이는 소리가 유미의 가슴속에 울려퍼졌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마음을 닫기로 했다. 두번 다시 되돌아 올 것 같지 않은 희성의 집을 뒤로 하고 유미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유미에요.. 네.. 이제부터… 네.. 일단 집에 가서.. 네.. 저녁 준비하고.. 아.. 그래요?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네.. 짐만 가져다 두고.. 바로.. 알았어요.. 곧 갈게요”






“연구실에 도착해서 자료 정리만 끝내고 올해는 이걸로 접도록 하자”




“…네”




“정말 고생 많았어. 내년은 본격적으로 네가 했던 연구성과를 계기로 한 프로젝트의 출범이네.. 네가 입버릇처럼 돕고 싶다고 말하던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연구니까 더 힘내도록 하자고. 기대하고 있을게”




“네.. 열심히 하겠습… 응?”




“왜?”




해질녘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가로수길을 따라 이학부 연구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올해 마지막 미팅을 끝내고 프로젝트도 잠시 휴식이었다. 해가 바뀌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재개될 것이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희성의 눈을 따라 지영이 돌아보았다. 서로 팔장을 끼고 걸어가던 두 사람이 방향을 바꿔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멍청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건 여전하네?”




보라는 듯이 유미의 허리를 감아 안고서는 희성이와 지영의 앞을 가로 막았다. 유미는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늘어뜨린 긴 머리 아래로 희성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후드가 달린 다운점퍼에 맨다리의 미니 스커트. 굽 높은 숏부츠를 신은 차림새였다. 향수냄새가 진하게 풍겨졌다. 지훈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차려입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나봐?”




지훈은 삐딱한 웃음을 만면에 띄운 얼굴이었지만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지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눈빛이었다.




“응? 누구시더라..? 아..난 또.. 이쪽은 내 여자친구에요. 뭐해? 유미 너도 인사해야지? 네 전 남친의 선생님이시잖아”




“…지훈이 여자친구.. 유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지훈의 팔을 잡고 고개를 숙인채였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형 같은 유미의 모습에 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막 수업이 끝나서.. 저녁이나 먹으러 가는 길이야.. 너도 갈래? 하하하하.. 참 어차피 넌 연군가 뭔가 때문에 바쁘지? 방해할 수야 있나.. 똑똑한 네 머리속에 있는 건 언제나 그 훌륭한 연구 분이잖아.. 나머지 일이야 뭐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아? 훌륭해.. 훌륭하다니까.. 아주 존경스러워. 뭐 어떤 연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생 하시라고~”




주먹을 쥐고 꼼짝도 하지 않는 희성을 향해 지훈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뭐 그 연구 덕분에 이년은 너랑 사귈 때부터 매일같이 나랑 했던 거 아냐.. 지금은 아예 우리집에 눌러붙어 산다고. 아주 신음소리가 죽여준다니까? 살살 녹아요 녹아.. 매일 아침까지 데리고 노느라 수면부족이야 수면부족!”




“오늘 아침에도 말야.. 안아달라고 보채잖아. 그래서 뭐 할 수 없이 아침에 섰던 김에 한번 쑤셔줬더니 아주 난리라 났어요.. 지가 막 엉덩이도 흔들고 질질 싸면서도 더 해달라고 조르잖아. 이러다 내 몸이 다 축나겠어.. 오늘 아침부터 몇번이나 했더라?”




“저런…”




있는 일, 없는 일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으며 빈정대는 지훈의 말을 지영이 끊고 나섰다. 지영이 유미가 찬 목줄을 손가락 끝으로 만졌다.




“으음… 요즘엔 이런 패션이 유행인가보지? 감각 참 별로네”




“뭐라고?”




반짝이는 검은 가죽 개목걸이에 달려있던 자물쇠를 지영이 퉁하고 튕겼다.




“… 이런 거라도 달고 있지 않으면 여자 마음하나 붙잡지 못할정도로 불안한가보지? 요즘 남자 애들이란.. 참 한심하단 말이야..”




지영의 도발에 지훈이 발끈했다.




“뭐야 당신… 전에부터 깐죽깐죽.. 뜨거운 맛이라도 좀 봐야 알겠어?”




“저런.. 그래? 나도 너 같은 애는 정말 맘에 안들어서 말야”




하지만 지영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웃어보였다.




“뭐.. 뭐라고? 이년이!”




앞으로 한발 나서려는 지훈의 팔을 유미가 있는 힘껏 잡아 말렸다.




“지훈아…”




“뭐야 이거 안놔?”




“시간 늦었어.. 어서 가야 되지 않아? 응? 어서 가자…”




그렇게 말하는 유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인 채였다. 말투 역시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음.. 운 좋은 줄 알아… 씨발년.. 알았으니까.. 가서 택시 잡고 있어”




지훈의 말에 서둘러 정문쪽으로 뛰어가는 유미의 뒷모습을 흘깃 쳐다본 후 지훈이 희성이에게 으르렁 거렸다.




“멍청한 새끼.. 이따 7시까지 시내에 있는 흑장미라는 클럽으로 와봐. 저년이 이제 어떤 년이 되었는지 보여줄 테니까 말야.. 아직 쟤한테 미련 남았지? 아마 안오고는 못 베길 거야 크크크큭.. “




그렇게 희성이를 향해 빈정거리던 지훈이 이번엔 지영을 향했다.




“그리고,, 너도 앞으로는 입조심 하라고.. 몸 버리고 싶지 않으면 말야 흣”




껄렁한 태도도 지영을 향해 쏘아붙인 지훈이 몸을 돌려 유미가 걸어간 쪽으로 걸어가 버리고 말았다.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기분 잡치게스리.. 정리고 뭐고 오늘은 그만 접자.. 그게 낫겠어”




지훈의 태도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희성을 바라보던 지영이 역시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유미가 떠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은은한 향수냄새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희성이만이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지혜야~?”




문이 잠긴 연구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지혜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선생님”




“왜그래? 이런 곳에서… 기다린 거야?”




하지만 지혜는 지영의 물음에도 대답도 하지 않은채 젖은 목소리로 딴소리만 할 뿐이였다.




“선생님.. 도와주세요.. 제발… 오빠를 좀… 도와주세요…”




“음.. 일단 안으로 들어와보렴”




연구실 안으로 들어선 지영이 문을 닫고 히터를 켰다. 교수실의 쇼파에 지혜를 앉인 후 진정되기를 기다려 마주 앉았다. 지혜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희성이 오빠와 유미선배를 좀 도와주세요…”




지혜는 앉지도 서 있지도 못할 듯이 조급한 표정이었다.




“부탁드려요.. 희성 오빠에게 힘이 좀 되어 주세요.. 이대로 두면.. 유미 선배가…”




거기까지 말을 마친 지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럴지도.. 이대로 두면.. 안될지도 모르겠더라..”




지영은 방금 전 만났던 유미의 무표정한 얼굴, 초점이 없던 눈동자를 떠 올렸다. 그런 상태라면 곧 마음이 전부 망가지기 일보직전일 터였다.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데 라뇨? 이미 늦기라도 한 거에요? 선생님도 어떻게 못하실만큼? 전 이제.. 어쩌면 좋아요?”




무릎을 감싸 안고 있던 지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물론 그 아이를 그 남자애한테서 떼어놓을 수는 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선생님!”




지혜가 큰 소리로 지영을 불렀다.




“선생님은 괜찮으신 거에요? 두 사람이 어떻게 되어도? 그럼 두 사람.. 너무 불쌍하잖아요”




지영을 향해 원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원망은 곧 지혜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자신에게는 그들을 불쌍하다고 할 자격이 없었다. 자신 역시 해서는 안될…




“좋아요.. 제가 저질렀던 일이니까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지혜를 지영이 달래듯이 입을 열었다.




“좀 기다려 보자 지혜야”




“어떻게 더 이상 기다려요? 전 그렇게 못해요”




“나도 말야.. 지금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주고 싶긴 한데 말야..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해. 강제로 떼어놓기만 해서는 어떤 해결도 되지 않거든.. 그래서는 두사람..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게 된단 말이야”




“그럼..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아요?”




“앉아보렴…”




지혜가 어느정도 진정이 되지 지영은 가만히 지혜를 바라보았다.




“지훈인가 하는 애 목적은 아마… 그녀를 희성이한테서 뺏으려는 게 아닐 거야. 그럼 그 목적이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아마.. 희성이를 괴롭히기 위해서일 거야. 희성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빼앗고 짓밟는 것으로 희성이를 괴롭히기 위해서 일 거라고 생각해..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뺏는 것만으로는 그치질 않고, 희성이 눈 앞에서 빼앗은 그녀를 자기 생각대로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줘서 희성이를 더 힘들게 하고 있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더 힘든 거야.. 이래서는 끝내질 못하지..”




“그..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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