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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 4부2장(1)

관리자 0 2634
제2화






역 구내에서 밖으로 나서자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파고 들었다. 가죽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셔터가 내려진 거리를 따라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지훈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다녀와…”




작은 소리로 잡지를 들고 침대에 앉아 있던 유미의 작은 등과 홀쭉해진 얼굴, 공허한 눈빛과 윤기를 잃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떠 올랐다. 집에 혼자 남겨진 유미의 모습이 떠올라 지훈은 발 걸음을 멈추었다.




“요새 빠지는 애들이 많아서 오전 중만이라도 좀 도와달라는데?”




아침에 걸려온 레스토랑 점장의 전화였다. 하지만 유미의 태도는 단호했다.




“가지 마!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고 했잖아”




달라붙으며 애원하던 유미를 억지로 떼어놓고 집을 나섰다. 혼자서 그렇게 집을 나선 것도 며칠만의 일이었다.




“아르바이트 같은 거 안가면 안돼? 얼마가 필요해? 돈은 내가 낸다고 했었잖아”




아파트 앞 자판기에 캔 커피를 사러 간다고 해도 유미는 바로 따라 나섰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훈이 방에서 일어서기만 해도 눈으로 그 모습을 쫓고 있었다. 같이 있는 동안 잠시도 떨어져 있으려고 하질 않았다. 멍한 무표정으로 방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천정만 올려다 보고 있는가 싶으면 갑자기 짜증을 내며 TV를 켜기도 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옷속으로 지훈의 손을 넣게 하고는 섹스를 해달라고 하기도 했었다. 연말부터 계속해서 그렇게 둘이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 온천여행 이후 유미가 좀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은 지훈이도 느끼고 있었다. 망가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유미의 모습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었던 가슴아픔이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집을 나섰던 것이었다.




“지훈아…”




이제 막 도착한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지훈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원했던 대로 유미 선배를 손에 넣은 것 치고는 얼굴색이 안좋은데?”




“더 이상 상관하지 말랬지?”




지혜였다. 지훈이 무서웠지만 결심이라도 굳힌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이제 그만 할 수는 없겠니? 지금이라면 아직.. 더 늦기 전에 이러는 거 그만 두자.. 유미선배를 이제 그만 놓아줘.. 지훈이도 사실은…”




“닥쳐”




“희성오빠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유미선배를 끌어들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이대로라면 정말 유미선배 망가지고 말 거야.. 뭔가 화를 낼 대상이 필요하다면 내가 선배 대신 받아줄게.. 그러니까…”




철제 문이 울리는 소리가 지혜의 말을 끊었다. 지훈이 발로 문을 차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닥치라고 했지?”




지훈이 으르렁 거리며 지혜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동안, 그 남자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동안 그 자식은… 그 개자식은 아무런 고통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왔었다고… 그게 왜 그자식이어야 했는데? 왜? 나면 안되었는데? 잘들어.. 희성이 그 자식이 가진 건.. 어쩌면 내가 가졌어야 했던 건지도 모르는 거라고. 나한테는 그 자식한테 모든 걸 빼앗을 권리가 있다고. 알아?”




“무..무슨말 하는 거야? 지훈아.. “




“지금도 온몸의 상처가 쑤신다고.. 이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도 않아. 그러니까 그 자식한테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 한둘쯤은 남겨줘야 공평하지 않겠어? 그 자식 존재를 알고부터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얼마나 다짐해왔는지 알아? 아직 멀었어.. 절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그래.. 이번엔 그 자식이 하는 연구인가 뭔가를 아예 망쳐줄까?”




지혜의 멱살을 바짝 틀어쥐고 광기에 가득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진정해.. 어떻게 하면.. 그 화를 풀 수가 있겠니? 내가 뭐든지 다할게.. 응?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이런 짓 계속해봐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원한이 풀릴 리가 없잖아.. 나.. 이제 알 거 같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는 것으로는… 원한이나 고통은 가시질 않는 다는 걸… 복수 같은 거 해봐야..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는다는 거… 이제 알거 같단 말야”




“뭘 이제 와서 착한척인데? 너도 유미를 가지고 잘도 놀았잖아? 그렇게 착한 척 하는 여자 정말 싫대매? 그래서 내편을 들었던 거 아냐? 너도 나랑 같은 종류라고”




이렇게까지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지혜는 지훈의 원한이 이정도일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치 악마 같은 지훈의 모습을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했던 짓이.. 용서 받지 못할 짓이라는 거… 나도 잘 알아.. 그래서 이러는 거야. 평생이 걸려서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거 잘 알기 때문에… 제발 부탁이야 지훈아.. 이제 그만해. 유미 선배를 이제 그만 놓아줘. 한번 생각해 보라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건.. 네가 당했던 그 일을 네가 네 손으로 되풀이 하고 있는 거 뿐이잖아”




지훈이 멱살을 틀어쥔채 지혜의 뺨을 후려쳤다. 자신의 분노를 있는 힘껏 뿜어내고 있었다. 지혜가 지훈의 발밑으로 쓰러졌다. 지혜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딴 남자랑 똑같이 만들지 말라고”




분노에 떨고 있는 지훈을 올려다 보았다. 지혜의 눈에 비친 지훈의 모습은 분노도 두려움도 아닌 고통만을 등에 지고 힘들어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제발 그만해… 유미 선배.. 사실은…”




지훈의 발길질이 지혜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지혜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아스팔트 위를 구르고 있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게 마지막 경고야.. 잘 들어.. 내 앞을 가로 막을 생각하지 말라고. 앞으로 끼어 든다던가.. 방해를 한다면…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마치 내뱉듯이 말을 마친 지훈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문을 닫은 지훈은 한동안 문에 기대어 서서 움직일 못하고 있었다.




“그딴 남자랑 똑같이 만들지 말라고…”




혼자 남겨진 지혜는 아픔을 참고 몸을 일으켰다. 지훈이 사라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영은 자신에게 맡겨두라고 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어떻게든 해서라도…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있던 유미의 실루엣이 역광에 비쳐 보였다.




“다녀왔어.. 야?”




유미는 잡지를 손에 꼭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그래?”




설마.. 아침에 나갈 때부터 지금까지? 벽에 걸린 시계는12시가 넘어 있었다. 설마 계속 저 자세로…?




“유미야”




당황한 지훈이 안으로 들어가 유미의 어깨를 흔들었다. 마치 죽은 생선 같이 탁한 눈에 약간 생기가 되돌아 오는 듯이 보였다. 천천히 지훈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쩐 일이야? 뭐 안가지고 간 거라도 있어? 아르바이트 늦겠다…”




“지금 다녀 오는 길이야. 벌써 점심시간이라고”




“아.. 그렇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유미도 잠깐 놀라는 듯 했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점심 먹어야겠네.. 볶음밥 해줄까?”




지훈을 보고 있었지만 지훈을 보고 있지 않았다. 밝았던 표정도 쾌활함도 화려함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생기없는 표정이었다. 지훈의 가슴이 다시한번 아파지는 것 같았다.




“좀 나갔다 오자. 부모님 내일 돌아오지? 집에 가기 전에 외식이라도 하고 오자”




“응.. 바로 준비할게”






“연초라서 그런가? 제법 막히는데?”




“…그러네…”




“세일이라도 하나보지?”






“그러네…”




“그렇군…”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복잡한 거리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이 좋은 연인사이로 보여질 것이었다. 유미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지훈이에게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화려해 보이는 쇼윈도우의 장식도, 복잡한 거리의 풍경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훈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거..너 한테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크림색 바탕에 꽃무늬가 들어간 긴 원피스가 쇼 윈도우에 걸려 있었다. 유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고개도 들지 않았다. 지훈이 어떤 옷을 보고 얘기하고 있는지 보려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한번 입어 볼래?”




“시착?”




“싫어?”




“아니.. 지훈이가 입으라면 어떤 옷이든 괜찮아”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였다.




“어머 정말 예쁘세요..”




탈의실의 문이 열리고 유미가 나오자 마자 여자 점원이 탄성을 질렀다.




“정말 잘 어울리시는데요?”




차분한 색상의 원피스는 비록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유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청초하면서도 가녀린 분위기를 더욱 더 잘 드러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흥미 없는 듯한 눈으로 앞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미야..’




유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후배들을 챙겨주던 유미의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부드러움을 가르쳐 준 여자..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같은 모습이었지만 혼이 빠져 있는 인형일 뿐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것이었나…




“자.. 포장해 주세요”




지훈은 그렇게 말을 하고 가죽점퍼 주머니에서 꼬깃하게 접혀 있는 지폐를 꺼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손끝으로 주름을 펴고 있는 모습을 유미가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지훈이 입을 열었다.




“아 이거? 아르바이트 월급.. 신경 안써도 돼”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유미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듯 굳은 표정이었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유미의 태도에 점원도 이상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이었다. 지훈이 일방적으로 말을 걸었고, 유미가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조용한 식사였다.




“…가능한 빨리.. 가능하면 내일이라도 돌아올게”




눈을 내려깔고 쇼핑백을 들고 걸어가는 유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 틈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훈은 그 자리에 서서 그렇게 보고만 있었다.






“아. 긴장된다.. 아.. 긴장 돼”




“야야.. 진정해.. 이제와서 아무리 긴장해봐야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유미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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