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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방시트콤 - 2부 2장

관리자 0 2828
제 2부 2장 : 미르의 전설



한편 철호는 몇 년만에 가시나를 만날 생각을 하니 휘바람을 절로 나왔다. 맨날 지하도에 쭈그리고 앉아있거나 발도 제대로 못편채 새우잠을 자던 시간 속에서도 인텔리한 노숙자라고 자부하면서 그나마 PC방엘 드나들면서 채팅이라도 했더니 이렇게 밝은 대낯에 가시나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여간 쁘듯한 것이 아니었다.



튼튼한 두 다리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딘 들 마다하겠냐만 마침 만날 장소가 가까운 동네라서 몇 푼 안될 차비마져 굳어 여간 좋은게 아니었다. 채팅을 통해 무척 우아한 여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막상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여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아니다. 남편이 죽고나서 상속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는 여자를 생각하니 모든 것이 황금색으로 칠해진 것 같았다. 법을 전공했다고 떠벌려놨지만 돈만 되면 정말 변호사 한명 고용해서 조금 도와주는 척하곤 단물만 꿀꺽 빨다가 사라져 버려도 세상에서 자기를 찾을 방법은 없을테고 일단은 만나서 면상이라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약속장소를 찾아 나섰다.



영희엄마인 이미숙은 영희를 어기지로 죽돌이한테 맡길 수 있어서 여간 다행인게 아니었다. 그 남편인지 웬수지 하는 놈은 몇 달째 집구석에 곰팡이가 꼈는지 보지 속에 곰팡이가 꼈는지 거들떠 보지않고 허구헌날 PC방에서 게임을 한답시고 밤을 보내지만 가끔 미숙도 몸이 근질거릴 때는 어떻게든 꼬득여 한판 벌려볼 욕심으로 PC방엘 가보면 자리에 없기 일수였다. 어딜 갔었냐고 따져 물으면 아이템 팔러 갔었다는 앵무새 같은 말만 주워 담는 통에 이젠 진절미가 날만큼 나서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말에 묻지 않기로 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남자가 돈도 많고 똑똑하다니까 언젠가는 판검사라도 될 가능성이 있는 반면 영희아빤 평생 게임 속에 빠져 살며 인생을 낭비할테니 늙어 꼬부라진 담에는 뭘해서 먹고 살는지 대책이 서질 않는 정말 전형적인 백수다. 미래가 없는 그런 놈을 믿고 영희를 낳은 것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마땅한 대안도 없다보니 자꾸 가슴이 미어지며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어이, 여기요. 여기.”



이미숙이 제과점 문을 여는 순간 젊고 멋있는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서로 초면인 관계로 눈에 잘 띄는 빨간 브라우스를 속에 바쳐입고 가겠다고 말했는데 담번에 알아보는 걸 보면 어제 채팅하며 약속한 사람이 틀림없어 보였다.



“어머, 언제 오셨어요?”

“예, 일분전 쯤? 지금 막 왔어요.”

“늦을 뻔 했어요.”

“왜요? 바빴어요?”

“아뇨, 아이를 봐줄 사람이 늦었거든요.”

“아이는 몇이죠?”

“나이를 봐요. 겨우 딸 하나에요.”

“쯧쯧,,, 딸 하나 달랑 놓고 죽었으니 시댁에서 난리를 치는거군요?”

“글세 말이에요. 아마 아들이었으면 군말도 없었을텐데...”

“아무튼 남아선호사상이 큰 문젭니다.”

“맞아요. 잘 키운 딸하나 열아들 안부럽다는 말도 있던데.”

“그럼요, 아들이라고 모두 잘 되라는 법이 없잖아요. 저를 봐요. 우리 부모가 얼마나 후회하는지 몰라요.”

“어머, 댁처럼 멋있는 아들을 둔 부모님이 왜 후회를 해요?”

“어쿠,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린 딸이 없거든요.”

“아, 딸 귀한 집에선 아들이 조금 구박받는 경향이 있죠.”

“그래요. 우리집엔 아들만 주루룩 있다보니까 귀한 대접을 못받고 살았어요.”

“너무 멋있어 보여요. 잘 사는 사람들은 머리에 가름마 타고 덕지덕지 기름 바르던데 댁은 정말 수수해 보여요.”

“하하, 원래 없는 것들이 광내고 난립니다. 저처럼 원래 있는 집에서 자란 사람은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지 위화감 조성을 절대 못하게 가정교육이 철저하죠.”

“맞아요. 사회 지도층이 그렇게 분별력있게 살면 얼마나 좋아요.”

“그럼요. 친구들이 BMW 타고 다니라고 난리지만 우린 지하철을 이용하죠.”

“정말요? 우와 멋진 분이시다.”

“전 지하철이 좋아요. 허구헌날 지하철에서 살고 싶으니까요.”

“그 곳이 뭐가 좋아요? 미세먼지랑 분진 때문에 목이 칼칼하고 불쾌하던데.”

“그래요? 워낙 맑은 공기만 마셨으니까 가끔은 탁한 공기로 정화시킬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렇겠네요. 역시 품위가 있어 보여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스물넷이라고 하더니 더 젊어 보이네요.”

“호호호, 정말요?”

“그럼요. 누가 아이까지 있다고 믿겠어요?”

“한 몸 했었죠. 그 이한테 홀딱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CF계에서 한창 활동했을텐데.”

“옷이 착 어울리는게, 연예계로 진출했으면 대박 터졌겠어요.”

“벗은 몸매는 더 죽여줘요.”

“허걱, 저에겐 벗은 몸매를 감상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지만 정말 그럴 것 같아요.”

“왜 감상을 못해요?”

“제가 어떻게 감히...”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감상만 한다면야 망설일 것도 없죠 뭐.”



철호는 쾌재를 불러야 했다. 청 대면에서 해서는 안될 말을 꺼내놓고 속으로 엄청 당황했던 말을 이렇게 멋지게 받아내며 알몸을 감상할 기회를 주겠다니 횡재가 따로 없구나 싶었다.



“처음 만났으니까 우아한 얘기만 해야겠죠?”

“여긴 동네라서 이렇게 두 사람이 있으면 오해 살 것 같아요. 조금 멀리 갔으면 좋겠는데.”

“맘에 두고 있는데라도 있어요?”

“아뇨, 그냥,,, 어딜 가자고 말하면 가 보려구요.”

“내가 차를 갖고 오지 않아서 행동반경에 제한을 많이 받거든요.”

“그럼 어때요. 가정교육이 잘 돼서 차를 안 타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해만 해주신다면, 요 앞 정류장에서 제일 멀리까지 가는 노선버스를 한번 타 볼까요?”

“저, 시간 많지 않거든요. 여기 말고 동네사람들 눈에 안띄는 다른 곳이면 무조건 돼요.”

“그럼, 저 쪽 길건너로 갈까요?”

“빵값은 제가 계산할테니까 일단 길을 먼저 건너세요.”



이미숙이 빵값을 계산하는 동안 철호는 신호등을 따라 먼저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젊은 미망인이 굶어도 한참은 굶은 모양이다. 차마 먼저 모텔에 들어가자는 말을 하기 민망해서 우회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지만 막상 주머니를 뒤져보니 만원짜리 한 장만 딸랑 있으니 여자가 가자고 말해도 막상 들어갈 형편이 아닌 자신의 몰골이 너무 초라하기만 했다.



여자는 철호가 모텔이 많은 골목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종종걸음으로 따라 붙어 얼른 팔짱을 낀다.



“저기 모텔에가서 편히 쉬면서 얘길 하자는거죠?”

“어머, 누가 모텔엘 가자고 했어요?”

“남들 눈에 띄기도 싫고 멀리 갈수도 없다면 저기 밖에 없잖아요.”

“저기 들어가도 아무 일 없는거라면 몰라도.”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점잖은 체면에 들락거리기 쑥스러울 뿐이지.”

“그럼 우리 가요. 대신 아무일도 없어야해요.”

“어휴, 속고만 살으셨나봐.”

“아니요. 그냥 무슨 일이 생길까봐 조금은 겁나거든요.”

“근데....”

“왜요?”

“수표밖에 없으니 이걸 어쩐다?”

“수표를 내면 되잖아요.”

“수표 추적 들어오면 영락없이 모텔에 들락거린 걸 아버님이 알테고...”

“어머, 그럴수도 있겠네요.”

“이럴 땐 돈 많은 것도 불편하다니까.”

“얼마면 되죠?”

“잠시 앉았다 갈꺼니까 커피값 정도면 되겠죠 뭐.”

“그러니까 그게 얼마냐구요.”

“호텔만 다녀서 여긴 얼만지 모르겠네.”

“아마 삼만원 정도 할꺼에요.”

“어떻게 그걸 알죠?”

“남편이랑 가끔 와봤거든요.”

“허허, 결혼 전에 말이죠?”

“네...”

“삼만원 때문에 수표를 낼 수도 없고, 수표를 받아도 추적이 겁나고, 애이 오늘은 걸으면서 얘기나 조금 하다 헤어집시다.”

“어머,,, 삼만원은 저도 있어요. 그렇잖아요 오십만원 찾아 오는 길인데.”

“어휴, 오십만원이나 뭘하려고 갖고 다녀요?”

“그게, 심부름인데요. 잠시 시간은 낸거에요.”

“저런, 급한 일이면 헤어지고 다음에 만나죠 뭐.”

“아니, 급할 것도 없어요. 한두시간 쯤 얘기할 시간은 되니까요.”

“실례지만 오늘은 모텔비를 내줘요. 담엔 내가 호텔 구경을 시켜줄테니까.”

“좋아요. 빵값도 냈는데 뭐.”



이미숙은 조금은 낯설지 않은 듯 모텔 카운터에 삼만원을 내밀었다. 모텔직원은 물어볼 것도 없이 잠시 머물다갈 사람들이란 것을 꿰뚫었다는 눈치로 방키를 내밀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데기 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두 사람의 눈 빛은 빛나기 시작했다.



김동수와 명희라는 아가씨가 영희엄마 때문에 한참을 얘기하는 동안 나는 제법 익숙해진 솜씨로 몹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김동수가 얼추 문파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신 초보자 것을 키우는 중이라고 말한 탓인지 게임 채팅창엔 문주라고 여기는 내 캐릭터를 향애 끊임없이 귓말이 들어왔다.



“오빠, 영숙이에요.”

“...”

“왜 삐졌어?”

“난 네가 누군지 몰라.”

“아잉, 그러지마. 오빠 보고싶단 말야.”

“누군지 모른다니까.”

“그날은 다른 오빠랑 약속이 있었거든. 정말 아무일도 없었어.”

“아무일도 없었다구?”

“오빠가 최곤데 누구랑 하겠어.”

“...”

“이따 새벽에 시간 낼꺼지?”

“...”

“아잉, 이따 봐. 근질거린단 말야.”

“...”

“말은 안해두 그리 나올꺼지?”

“아니.”

“정말 삐진거야?”

“몰라.”

“오늘은 다른델 갈까?”

“...”

“그럼 길건너 비디오방으로 갈게.”

“...”

“왜 말 안해?”

“몇시?”

“응, 새벽 두시에 갈게.”

“알았어.”



김동수라고 믿고 지껄여대는 여자의 말은 비록 한글로 쓰여져 있지만 처음에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결국은 빠굴 한판 때리자는 얘기로 귀결되는 것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도대체 어떤 년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이따가 새벽 두시에 길건너 비디오방엘 가봐야겠다.

쉼없이 흘러내리는 채팅창의 대화내용 때문에 비디오방에서 만나자는 아가씨의 내용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다른 대화들로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어이, 문주.”

“왜요?”

“누군지 모르겠는데 내 채팅창에 새벽 두시에 날 좀 만나자고 하네.”

“어이쿠, 게임한지 몇시간도 안된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발전했어요?”

“몰라. 그냥 누군지 모르는데, 자꾸 귀찮게 만나자고 졸라대네.”

“그럼 만나봐요. 그렇게 얼굴 익히면 게임도 즐거워지잖아요.”

“근데, 모르는 사람한테 자꾸 글이 날아오니 게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어, 그럴 리가...”



김동수는 순간적으로 내 캐릭터를 키우기 위해 문주의 이름으로 문파회원들에게 지금의 케릭터가 자신임을 말했던 기억을 해 냈다. 그럼 새벽 두시에 만나자는 년은 분명 자신이 챙기는 년인데 도대체 누군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아저씨, 잠깐만 일어나보세요.” 김동수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대신 내 의자에 앉아 채팅창을 올려보며 나랑 대화한 여자를 추적하려고 했지만 워낙 많은 대화내용이 쏟아져 내린 탓에 더 이상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찾아내질 못했다.



“아쓰블, 누군지 모르겠네.”



“오빠, 나 말고도 딴 년 있는거야?”

“아냐, 난 너 밖에 없는거 알잖아.”

“새벽 두시는 뭔데?”

“모르지...”

“그럼 오빤 나랑 새벽 두시에 나가자.”

“뭐? 하필 새벽 두시냐?”

“오빠랑 어떤 년이 만나면 나 죽는거 알지?”

“어휴, 알았어. 별일 아닌 걸 갖고 저 아저씨가 괜히 힘들게 하네.”

“저 아저씨도 이젠 우리 문파야?”

“응, 명희야 인사해라. 오늘 입문한 사람이야.”

“안녕하세요. 이명희라고 해요.”

“어, 안녕하슈, 난 김갑수라고 합니다.”

“뭐 하시던 분이세요?”

“나? 백수.”

“어휴, 썩은 냄새가 진동하네...”

“명희야, 게임에 몰두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러냐?”

“하긴, 오빠도 어떨 땐 몸에서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기도 하더라.”

“그러는 넌 비너스구?”

“내가 뭘?”

“너도 겜에 빠지면 몇일 째 화장실도 안가고 죽 때리잖아.”

“숙녀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그러니까 몸에서 냄새 난다고 남을 탓하면 절대 안된다는 걸 잊지 말라구.”

“그럼 갑수 아저씨는 이 게임 하기 전엔 무슨 게임했어요?”

“나? 채팅.”

“어머, 채팅에 빠져서 죽돌이 되는거 쉽지 않은데...”

“난 좀 별나거든. 아무거나 한번 빠지면 끝장을 보는 성미거든.”

“하긴 그게 게임하는 사람들 습성이죠. 암튼 만나서 반가워요.”

“명희야, 저 아저씨는 오래전에 여자 맛을 잃었단다.”

“설마.”

“저 몰골에 누가 붙겠냐.”

“하긴...”

“아저씨, 새벽 두시에 누군지 모르지만 아저씨 가지세요.”

“뭐? 누군지도 모르는 여잘 나보고 어떻하라구.”

“그럼 어쩐다...”

“오빠, 그 년이 누군지 궁금하다.”

“뭐? 네가 왜 궁금해?”

“그냥. 암튼 숨겨놓은 애인이라면 죽는줄 알라구.”



이명희는 주먹을 쥔 채 김동수의 면전에 내밀어 보이곤 영희가 놀고 있는 쇼파 쪽으로 쪼르르 도망쳐 버렸다.



“아저씨, 새벽 두시에 길건너 비디오방이래요?”

“응.”

“거참, 누굴까?”

“처음엔 그곳으로 오라던데?”

“그곳이요?”

“장난치는 줄 알고, 싫다고 했더니 그럼 비디오방으로 오라던데.”

“어,,, 그럼 영숙이네. 고년 지난번엔 잘도 빠져나갔었는데...”

“예뻐?”

“어휴, 죽이죠. 걔 몸매보면 환장한다니까요.”

“새벽 두시에 몸을 두 개로 쪼개야겠구먼.”

“저 명희란 년은 얼굴도 몸매도 별룬데다 성질은 얼마나 더러운지 몰라요. 확 차버려도 허구헌날 쫒아 다니는 통에 귀찮아 죽겠네.”

“거참 문주 양반은 복도 많수.”

“이 참에 영숙이를 확실히 내 여자로 만들어야하는건데...”

“나보고 영숙이 가지라며.”

“애이, 그 땐 영숙인지 몰랐지요.”

“알았어. 담 부턴 문주가 버리는 애들이나 주워 먹어야겠군.”

“어, 그럼 명희년이랑 시간 좀 보내고 계실래요?”

“어디서?”

“거, 왜 맥주 한조끼 주욱 마시라구요.”

“일 없어. 돈도 없구. 내가 초라하게 보이겠지만 남이 버린 여잘 정말 주워 먹게 생겼나?”

“그게 아니구요. 어차피 쟤 보담 영숙이년 한테 신경 써야 하거든요.”

“문주의 명령이 벌써 시작된건가?”

“돈 없다구 그랬죠? 내가 오만원 주고 갈테니까 쟤 좀 말려주세요.”

“오만원? 요즘 술값이 그것 밖에 안하나?”

“아껴 먹으면 충분한 돈이잖아요.”

“그럼 영숙이랑 한판 뜨고 다시 올꺼야?”

“못오죠. 명희가 지랄 못하도록 아저씨가 잘 챙기라구요.”



김동수는 주머니에서 오만원을 꺼내 명희 모르게 내 주머니에 찔러 넣어준 후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게임화면 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얼추 익숙해진 게임 속으로 힘겹게 몹과 싸움질을 해대며 문파의 거대한 싸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어머, 정말 조용하네요.” 이미숙은 모텔방 침대위에 철호와 함께 걸터 앉은 채 말했다.

“살면서 이런 공간이 항상 필요하죠. 남들 간섭을 피해 사색할 공간 말입니다.”

“멋져요. 사색의 공간 말이죠?”

“그럼요. 우리처럼 고시생들은 가끔 절간에도 들어가지만 이렇게 조용한 적막은 없지요.”

“그럼 절간에 계신거에요?”

“아뇨, 집이 워낙 부자라서 공부방이 이 정도는 돼거든요.”

“너무 부러워요.”



이미숙은 살며시 긴머리채를 철호의 어깨위에 기대고 있었다. 철호도 모른 척하며 그런 미숙의 허리를 한 손으로 살짝 감아본다.



“살면서 내 숨소리가 이렇게 크구나 느낄 정도로 조용한 공간은 첨 이에요.”

“이런델 자주 다니면 사색이 깊어지고 호흡도 깊어져서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습니다.”

“아휴, 모든걸 철학적으로 얘기하시네.”

“이왕 돈 내고 들어온건데, 찌뿌등한 몸에 물 좀 뿌리고 오겠소.”

“어머, 그러세요. 그렇잖아도 뭔가 안좋은 냄새가 어디서 나나 싶어 코를 막고 있었는데...”



철호는 몇 달 만에 이렇게 초호화 목욕탕이 딸린 곳에 들어왔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비록 노숙자로 살면서 양치질도 오랜만에 했지만 무엇보다 뜨거운 물줄기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기회가 온 만큼 목욕을 놓쳐서는 절대 안된다는 절박감마져 느끼고 있던 차였다.



세면장문을 잠그고 옷을 훌훌 벗어 버린 철호는 뜨거운 물을 탕 안에 가득 담은 후 찌든 속옷을 비누질해가며 시원하게 빨래를 시작했다. 추운 날씨라 속옷이 언제 마를진 몰라도 우선 귀한 뜨거운 물을 만난 마당에 세탁을 미룬다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수 없으므로 미련없이 옷가지를 훌훌 벗어 탕속에 휘휘 저어 빨래를 헹구고 두 손목에 힘을 잔뜩 넣어 물기를 꼭 짜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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