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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노예 - 4편

야설 0 153

그녀한테 단둘이 만나자고 한 건 만약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직면하면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되지 않아서 였다. 그는 그야말로 아주 뺑 돌아서 맛이 갔다는 것을 인식했고
어느 정도 진정할 여유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믿지 않으려고 다 허세라고 생각하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 날짜까지 들으니 입맛이 썼다. 하지만 질투하고 분노하기에는
그가 한 짓이 있기에 대놓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한테 놓인 현실이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할 수 없게 끔 다그쳤다.

과거보다 불확실한 미래가 더 신경 쓰였다. 
한마디로 그녀와 그는 미래가 없었다. 계획을 세울 수도, 약속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났고 그를 이렇게 오도 가도 못 하게 만든 그녀가
지긋지긋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끊어 낼 수 없는 질긴 감정의 실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녀를 원망할 계제도 아니었다. 먼저 선을 넘은 건 그니까.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서 그녀의 소녀다운 감상을 이용해 계획적으로 유혹했다.

순진한 그녀를 섹스의 맛에 길들인 것이다. 
그가 느끼는 아주 지독한 갈망을 그녀가 알기를 바랐다. 그녀를 너무나 원해서 죽을 것 같았던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다. 그는 나쁜 놈이었고
지금도 나쁜 놈이다. 안다. 너무나 잘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악마는 죄책감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영아..........................................................................”

“네?...........................................................................”

“너 나한테만 이래야 해..................................................”


그는 말을 아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도 알 것이다. 순간 그녀의 짓궂은 미소를 보니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왜... 내가 다른 남자한테 다정하면 싫어요?.....................”


굳이 이렇게 짚어서 그의 속을 후벼 파는 영아였다. 아주 확실히 영아는 달라졌다. 영아는 더 이상 그의 말이라면 별처럼 눈을 빛내던 순종적인 소녀가 아니었다. 영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훌쩍 자라 버렸다. 
그 사실이 뿌듯하면서도 불편했다. 영아를 향한 그의 감정은 처음부터 너무도 복잡했지만 그녀를 멀리했던 1년 동안 더 심해졌다. 영아가 그의 손이 못
미치는 곳으로 영영 떠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두려움까지 증폭되었다.

이 비슷한 감정은 정신적인 동반자였던 부친을 잃었을 때 알았던 감정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충격적이었다. 그는 여섯 살 때 부친을 처음 알았다. 그를 버렸던 생모가 죽음을 앞두고
그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그 후 부친은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처음에는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지만 부친의 진심을 느낀 후부터 부자 사이가 각별해졌다. 뿌리 없이
살았던 그에게 부친은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겨우 그가 마음의 문을 다 열었을 때 부친은 사라져 버렸다. 예고도 없이 떠나보낼 준비도 주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 배신이나 마찬가지 였다. 
온전히 믿게 해 놓고 다시 그를 외롭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슬픔에 빠질 여유도 없었다. 부친을 대신해서 모친을 보살펴야 했다. 사실 모친은
부친을 잃기 전까지는 아주 불편한 존재였다. 
당시 결혼 2년 차였던 모친은 불임 진단을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난데없이 남편의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모친은 무던히도 노력했고, 그게 어린 그의 눈에도 다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부친을 잃고 난 후 모친은 그를 마음으로 부터 받아들였다. 
그도 어려웠던 모친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거리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친에게서 느껴지던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은 모친으로 부터 얻기는 힘들었다. 그러다 영아를 만났고 그 순간 그는 아주 이상한 활력이 생겼다. 하루하루가 흥분의
연속이었고 부친을 잃은 후 처음으로 기대감마저 생겼던 것이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혼란스러웠고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인정하고 난 후 그는 혼란을 넘어서 지옥을 겪었다. 하지만 빠져나오려고 애쓸수록 그는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 가운데 분명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영아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꼴을 보느니 세상의 몰매를 맞고 죄인이 되는 게 낫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가진 신념과 명예와 부 지위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영아가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가는 것보다는 덜 아플 것 같았다.

전자는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상실감이지만 후자는 그 의지조차 무너져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크나큰 재앙이었다. 
그는 영아가 그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가
원하는 단 한 가지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확신이었다. 그게 지난 1년간 그가 깨달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응... 싫어... 넌 내 여자니까.........................................”
 

영아의 첫 남자도 그였고 하나뿐인 연인이고 싶었다. 그게 그의 진심이었다. 여자한테 한 번도 소유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지만 영아는 그가 상상도 못 한 강한 소유욕으로 이성을 잃게
뿌리 째 흔들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영아를 소유했던 남자를 본다면 마구 죽이고 싶을 것이다. 영아가 다른 남자한테 이 처럼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낸다면 그의 온몸이
산산조각 나 피가 마를 것 같았다.
 


“글쎄요....................................................................”


영아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파스타를 포크로 뒤적거렸다. 그 확신 없는 대답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올려 시선을 맞췄다.


“난 네가 필요해... 너도 마찬가지고...............................”

그의 확고한 검은 눈동자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가을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너에 관한 한 원칙이란 없으니까...........”


말도 안 되는 3년 운운하는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언변으로 먹고사는 그가 이 작은 여자한테 이렇게 사춘기 소년처럼 어설프게 굴다니!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아파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조차도 납득이 잘 되지 않으니 그녀를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활활... 다 타고 나서 재만 남으면... 우린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는 그럴 일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아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확신은 아주 부족했다. 
영아는 그만큼 세상 풍파를 겪지 않았고 남자 경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기준으로
보자면 철부지 어린아이 같았다. 
그녀의 말대로 좀 더 어른인 그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정상이기를 포기했다. 그녀 없이는 죽을 것 같으니 다른 사람을
배려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알았다. 태생부터 외로웠고 그 외로움이 지독한 갈망을 키웠다. 그의 굶주린 영혼은 이기적인 포식자였다. 그의 허기진 삶을 채울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영아였다. 
그걸 알아 버렸는데 여실히 깨달았는데 그녀를 놓아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자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지...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왜 미래에 집착해?... 우리한테는 근사한 현재가 있는데........”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눈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의도했던 밝은 빛이 아니라 그녀의 눈동자는 그늘이 졌다.


“알겠어요... 우리에게 내일이 없으니... 오늘만 충실하자는 거죠?......................”

“오늘만이 아니라 오늘도라고 생각해... 난 너와 함께 있을 때는... 나만을 위해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처음 받았을 때보다 더 큰 감동을 느껴...................”


뭔가 이해하는 듯한 영아의 눈빛을 본 순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 그녀가 입술을 깨문 채 그의 눈치를 봤다.
 “미안해요... 우연히 오빠가 보육원에서 자란 이야기를 부모님이 하는 걸 엿들었어요................”


혹시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직접 화제로 올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역시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불편하기는 커녕 오히려 편안 해 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영아니까 비밀을 갖고 싶지 않았다.
 

“언제?...................................................................”


“오빠... 서른 번째 생일에요... 부모님은... 생일 파티를 해주고 싶었는데... 오빠가 출장 중이라 집에 못 온다는 전화 받고 아쉬워서 이런저런 과거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일찍 집에 와
 있는 걸 몰랐던 거예요............................................”


사실 생일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집에 잘 가지 않았다. 그때도 출장 중이 아니라는 것을 부모님은 물론이고 영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출생이 모친에게는 아주
아픔이었을 거라는 죄책감 때문에 늘 불편했다. 그러니 생일은 되도록 본가를 가지 않았다.
 

“충격받았겠네........................................................”

“아뇨... 충격보다는 모자 사이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서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죠... 뭐... 그렇다고 안쓰러운 마음이 질투심을 없애 주지는 않았지만.................”

“질투심?...............................................................”


태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자 그녀가 그를 노려봤다.
 

“그 소식 듣고 오빠한테 전화했는데... 유진이 언니가 받더라고요..................”


난데 없는 공격을 받으니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빼지도 보태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최선의 답일 것 같았다.
 

“사실 아파서 정신이 없었어.....................................”

“어디가요?...........................................................”


그녀의 작은 얼굴에서 묵은 화가 가라앉고 걱정으로 가득 찼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몸살을 앓았어... 보통 때는 생일이면 혼자 지내는데... 그날은 어쩌다 보니 성가신 간호를 받게 된 거지... 비서를 통해 소식을 듣고 왔더라고.............”
 

비몽사몽간에 영아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들었을 때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 후 더 이상 모르는 척 전처럼 지낼 수가 없었다. 그는 영아를 여자로 원했고 이제 성인이 된
그녀의 주변에 남자가 생길까 봐 급격히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다고 해도 바로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더 버텼다.
 

“유진이... 언니는 좋은 여자 친구였네요....................”
 

칭찬 같지만 씁쓸한 어조였다. 그는 뭔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네가 말했던... ‘좋은’ 이 따뜻한 여자라는 의미라면 아니야... 내 겉만 보고 타이틀처럼 곁에 두고 싶어 했을 뿐... 진정으로 사랑한 건 아니니까... 만약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면 교제하지
 않았겠지............................................................”
 

“처음에는 그랬겠죠... 유진이 언니는 자존심이 대단한 분이니까... 그래서 더더욱 오빠 곁에 못 견뎠을 거예요... 진심을 주지 않는 오빠가 자신을 비참하게 했을 테니까...............”


영아의 순진한 시선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아직 세상을 모른다. 얼마나 전쟁 같이 치열한지 말이다. 하지만 굳이 세세하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두 사람한테
놓인 현실만 해도 충분히 복잡하니까. 
그래도 중요한 한 가지는 말해야 했다.

“내가 만약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보육원 출신이라면 과연 거들떠나 봤을까?...............”


그가 회의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영아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오빠는... 오빠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가지고 싶은 가치가 있어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영아의 입으로 들으니 감동이었다. 그녀는 그랬다. 그가 설령 헐 벗고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아니 그랬다면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녀만이 그가
누군지 실체를 알고 진심으로 좋아해 준 단 하나의 여자였다.
 


“고마워..............................................................”

“인사치레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난 네가 필요해..................................”


그랬다. 공기가 필요하듯 그의 생명 유지에 영아가 아주 절실히 필요했다. 
그는 그녀를 잃는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살 이유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편이
영아였으니까. 
그녀만 곁에 있으면 그는 외롭지 않았다. 영아의 존재만으로 꽉 채워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나도... 오빠가 필요해요......................................”

하지만 그녀는 찌푸린 얼굴이었다.


“나를 원하는 게 싫어?... 왜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야?...................”


영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파스타를 둘둘 말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신중했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행복이자 불행이겠죠... 참 모순이에요... 그렇죠?.......”
 

그는 영아가 파스타를 입에 넣고 씹는 모습을 아주 탐욕스럽게 바라봤다. 그도 그렇게 맛깔스럽게 그녀를 먹고 싶었다. 1년 만에 그녀를 안았는데도 옷도 다 벗지 않은 채 성기만 내놓고
허겁지겁 관계를 했다. 
그러고 바로 서울로 올라온 후에 그런 식으로는 안기 싫어서 뜸을 들이는 중이었다. 굶주린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 듯 겉만 채운 성교는 간에
기별도 안 갔다. 
그의 바지 앞섶은 불편할 정도로 볼록한 상태였다.

이를 누른 채 그녀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는 것은 과연 그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판결하는 시험대 같았다. 
그래도 그가 정성을 들인 요리니 그녀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전에 같으면 그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최우선이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1년 전 결별 선언을 한 이유가 성적으로 이용을 당했다는 오해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의 욕심보다는 그녀의 감성을 배려해 주면 오해가 풀릴까?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뭐든 노력을 해야 했다. 그녀를 잃으면 안 되니까. 처음 만나는
연인처럼 호감을 사려고 별짓을 다 하고 싶었다.
 

“불행은 우리가 떨어져 지냈던 시간이었지... 이렇게 같이 지내는 시간은 행복하잖아... 안 그래?..................”


그는 그랬다. 처절한 불행을 겪고 나니 영아와 함께 숨만 쉬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영아도 그와 같은 마음이기를 바랐다. 예전 같으면 당연하다고 확신했겠지만 지금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는 데 미세한 공백이 생겼다. 
그녀가 나이 들고 어른이 되고 자립심이 강해지는 데다 심지어 그를 쉽게 흔들 수 있는 여자로서의 강점이 불안감을 키웠다.
 

“설마... 우리가 마냥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난 우리가 즐길수록 더 죄인이 된 기분이에요... 우리가 언제까지 부모님 눈을 속일 수 있을까요?.............”

그건 그가 수없이 자신을 다그친 이유고, 1년 전 그녀의 결별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본질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 때문에 그의
삶을 포기하기 싫었다. 
설령 그 대상이 부모님이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세속적인 그 어떤 이유로도 희생하기 싫었다. 그가 당장에 죽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을 살필 여유가 어떻게
생기겠는가.

“길을 찾아봐야지................................................”

“무슨 길?..........................................................”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잖아.......”


그녀가 기도 안 찬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언제부터... 그렇게 초연해졌나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내 곁에 두겠다는 결심이 선 순간부터...............”


그의 결연한 어조에 그녀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박거렸다.


“그 결심이 언제 섰는데요?..................................”

“널 다시 찾으려고... 비행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결심했지.....................”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릴까 봐 두려우면서도 애써 허세라고 자신을 다독거릴 때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그녀를 곁에 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 같았다.


“내가 오빠한테... 마음이 떠났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영아가 포크로 그를 찌를 듯이 흔들며 코끝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 도발적인 모습이 너무 앙증맞아서 쓰다듬어 주고 싶어 손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꾹 참았다. 일단 그녀를 만지고 나면
뒷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만약 그랬다면 널 찾을 가치가 없었겠지... 난 항상 생각했어... 우린 뭔가 보이지 않는 단단한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아마 부모님 상견례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널 처음 봤을 때
 부터 느꼈던 것 같아..........................................”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깜박거렸다.


“음... 우린 영혼이 닮았을까요?............................”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외로운 영혼일 거야... 하지만... 황량한 나에 비해 넌 빛이 났어... 열다섯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조숙했고.............”


그는 아직도 선명하게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이 떠올랐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노안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죠... 하지만... 요양원에 댄스 봉사 활동 때문에 화장을 한 것도 한몫 했어요... 약속 시간이 촉박해서 지울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간 탓에 내 첫인상이 그랬던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어때요?... 이렇게 머리를 시원하게 자르니 내 나이보다 어려 보이지 않나요?.....................”

그는 새삼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녀 말대로였다. 귀밑에 찰랑거리는 웨이브 진 단발은 그녀가 이제 겨우 소년티를 벗은 대학 신입생 같았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것을 그녀를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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